* 여기서 말하는 영국 중산층 남자의 조건은 이전 화에서 말한 여자의 조건과 동일하다.
영국 중산층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좀 더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일단 직업부터 다양하다.
영국의 중산층 여자들이 대부분 육아와 일 병행이 가능하고 파트타임으로도 일할 수 있는 전문성이 보장된 일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면, 남자들은 임신/출산에 딱히 영향을 받지 않아 커리어를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아무리 한국보다 상황이 낫다고 해도 적어도 영국에서는 여전히 여자가 육아의 많은 것을 담당한다. 전문직이나 규모가 있는 회사가 아니라면 육아 휴직 기간 동안 내 자리가 보존된다는 보장이 없다. 그렇기에 당연히 경력 단절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고, 전문성이 없다면 단순 사무직이나 가게 점원 혹은 자원 봉사자로 일하는 여자들도 많다.
그리고 그런 경우 잔인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남자의 연봉이 아주 높거나 원래 계급이 높은 집안 출신이 아니라면 영국에서는 lower middle class로 속하게 된다.
앞서 말한 영국 중산층 여자의 경우 결혼, 임신, 출산, 육아 휴직, 복직, 등등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어떤 공동된 성향을 공유하는 것에 비해, 남자 같은 경우는 그런 과정 없이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겉보기로는 그들을 구별하기 어렵다.
고작 40대인데 이미 머리카락을 다 잃고 덥수룩한 수염에 배 나온 남자도 있고, 여전히 말끔하게 면도한 얼굴에 향수향이 은은히 묻어 나오는 남자도 있다.
평소에도 깔끔한 슬랙스에 셔츠, 폴로셔츠를 입고 다니는 남자가 있는가 하면, 엉덩이에 맞지도 않는 헐렁한 청바지에 프린팅 된 티셔츠나 후드티만 입고 다니는 남자도 있고, 골프를 좋아하고 명품 시계를 차고 럭셔리 브랜드 정장만 입고 다니는 남자도 있다.
다만 일상에서는 그렇더라도 영국 중산층에 해당하는 남자들은 직장에서 일정 수준의 연봉을 보장하는 직급을 가지고 있거나, 전문직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아서 저렇게 평소에는 뭣같이 입고 다니다가도 대부분 출근할 때는 정장이나 스마트 캐주얼 같은 옷을 입고 다닌다는 거다. 그런 면에서 영국은 아직도 보수적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공통점이라면, 다들 취미 생활 하나씩은 가지고 있고, 그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집안에 가지고 있다는 거다. 안정된 생활과 여유로워진 경제 사정을 바탕으로 관심을 그쪽에 쏟아붓는 거다.
예를 들어 내 남편을 비롯한 몇몇 남자들은 차고를 개조해 자신만의 mancave를 만들어 거길 자신의 서재, 취미활동, 개인용 헬스장 등등으로 쓰고 있고, 어떤 이들은 개조하는 대신 차고 자체를 자신의 아지트로 삼아 자동차 수리나 잡다한 DIY를 하기도 한다.
차고가 안되면 손님방이나 서재에 자신만의 티브이를 두고 영화/게임방으로 쓰거나, 미니바를 만들어 두기도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이후에는 아예 정원에 따로 office pod/shed를 짓는 경우도 많아졌다.
이건 그들의 교류에 꽤 중요한 요소가 되는데, 서로 취미는 다를지라도 희한하게 다들 DIY에는 진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멀쩡한 집을 매번 바꾸고 뜯어고칠 수는 없으니 보통 이 자신만의 공간에 DIY 스킬을 적용하는데, 그렇게 남자들은 서로를 이어 줄 공통된 화제를 발견한다.
"이번에 내 서재에 이런 선반을 만들어서 달 생각인데..."
이렇게 누가 운을 띄우면, 누군가는 자신이 디자인한 걸 보여주고, 누군가는 도구를 빌려주겠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이번에 쓰다 남은 목재가 있는데 필요하면 가져다 쓰라고 말하고...
뭐 그런 식으로 자기들 끼지 사진도 교환하고 따로 만날 약속도 잡고 그런다.
물론 취미 생활 자체를 공유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 급격히 떠오르는 운동 종목은 사이클링인데, 한때 남편들 사이에서 3000 파운드가 훌쩍 넘는 고가의 자전가가 유행을 탄 적이 있어, 그 모습을 보고 아내들 모두 혀를 차기도 했다.
이 경우 남편들이 이 취미 활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내들의 지원이 필수적인데, 자전거를 30분만 타고 오는 게 아니라 보통 어디로 멀리 가기 때문이다.
그동안 아내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따로 만나거나 아니면 아예 같이 휴가를 가기도 한다.
참고로 의외로 내 주변에서는 축구나 럭비 경기를 보겠다고 자기 메이트들과 우르르 펍으로 몰려가는 남자들은 잘 보지 못했다. 축구나 럭비를 좋아하더라도 대부분 집에서 아이들과 같이 보는 경우가 많아서.
또 하나 공통적인 걸 말하자면, 취향이 확고하고 그것에 소비하는 경비지출이 높은 편이다.
취미생활을 위해 값비싼 물건을 수집하거나, 고가의 장비를 사기도 하고, 쿨하긴 하지만 딱히 쓸데는 별로 없는 전자 기계나 물품들을 지르기도 한다. 보통 아내들이 'expensive toy'라고 부르는 것들.
예를 들어 주위 남자들 사이에서는 위에서 말한 고가의 자전거 붐에 이어, 드론 붐도 한번 불었었고, 커피 머신 붐도 한번 불었었다. 거기에 최근 남편이 3D 프린터를 사면서 친구들은 긴장하고 있다. 이게 또 남편들 사이에 유행이 될까 봐.
그럼 그들은 모여서 어떤 대화를 할까?
앞서 말한 것처럼 취미생활, DIY, 일, 집 (정확히는 부동산), 돈, 그리고 정치 이야기를 한다. 그 외 건강과 관련된 것도 급격히 떠오르는 토픽 중 하나다.
그럼 어떤 정보를 교환하는가?
최근에 핫하게 떠오른 gadget (가제트, 간단한 기계 장치), 전자기기, 도구, 취미생활과 관련된 장비/앱, 장소 DIY 노하우, 질 좋은 커피빈 타입, 등등 이런 걸 교환하고 공유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건 여전히 영국의 남자들은 아이나 집안의 소소한 일과 관련된 걸 '여자'의 일이라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다. 부부가 같이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면 남자들끼리 있을 때는 누구도 먼저 '이번에 아이가 학교에서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그런 주제를 꺼내지 않는다. 여자들 사이에서는 그게 가장 먼저 나오는 대화의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만약 '가정적'이라는 정의가 집에서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가족과의 약속이나 시간을 다른 친구들과의 약속보다 우선한다,라고 정해져 있다면, 영국에서 중산층 중년의 남자들은 단연코 가정적이다.
일 때문에 출장을 자주 다닌다고 할지라도 그 외의 시간에는 얌전히 아내의 말에 따라 가족 행사에 참가하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그게 설사 소파에 앉아 아이들과 축구 경기를 보는 것이라 하더라도), 아이들 등하교나 방과 후 활동의 의무를 아내와 나눠 가진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집안일을 나눠하는 것도 당연한 덕목 중의 하나다.
아내와 둘 다 일을 하는 맞벌이가 많고 연봉도 아내가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게 아니라면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아내가 더 돈을 많이 버는 경우도 있다),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 이런 식의 역할분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런 이유로 중산층 가정에는 식기 세척기, 세탁기, 건조기 등 웬만한 가전제품이 다 있고, 따로 청소 도우미나 정원사 등 집안일을 줄여줄 수 있는 다양한 사람도 고용한다. 집안일 분배로 시간과 에너지를 뺏기고, 괜히 커플 사이에서 불만이 나오기 전에 그냥 돈으로 해결하고 마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서는 아무리 중산층의 전문직 여자라 해도 많은 경우 아내가 자발적으로 파트타임으로 일을 돌려서 육아나 집안일을 담당한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에는 자신도 퇴근해서 아이와 함께 놀아주고 숙제도 봐주고, 집안도 정리하고, 등등.
그럼 여자가 결국에는 일도 하고, 집안일도 하고 육아도 담당하고 그러는 거 아니냐, 할 수 있는데, 사실 어느 정도는 맞다. 가정마다 다르겠지만 정확히 반반이라기보다는 여자가 아마 10% 정도는 더 많이 담당하지 않을까?
그래서 가끔은 생각한다. 그 10%의 부채감 때문에 남자들이 자신만의 취미생활을 한답시고 아내와 아이들을 집에 두고 혼자 나가기 미안하고 눈치 보이니 집안에서 어떻게든 타협을 보려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아니면 그냥 'Men are from Mars, Women are from Venus'라는 책에 나온 것처럼 그냥 남자들은 자신만의 동굴이 필요하니 집에다가 움막을 지어놓은 것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