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영국 the Food Foundation에서 영국 아이들을 상대로 조사해 발표한 리포트 'A Neglected Generation: reversing the decline in children's health in England' 연구결과가 모든 미디어 매체의 한 면을 장식했다.
리포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두 영국, 정확히는 잉글랜드에 살고 있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다)
- 5세 아이들의 평균 신장이 2013년부터 줄어들었다
- 10세와 11세 사이 아이들의 비만도가 2006년부터 늘었다
- 25세 이하 영국인들의 제2형 당뇨병 발생수가 지난 5년간 22% 늘었다
- 12년 전과 비교해 최근 신생아들이 생후 1년 동안 더 나쁜 건강상태를 가졌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아이들의 영양 불균형과 건강문제를 두고 정치인을 비롯한 사회가 들썩였고, 학교의 식단을 바꿔야 한다, 물가가 높아서 그렇다, 정부 정책이 잘못되었다, 등등 온갖 비난과 경고, 해결책 등이 난무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영국에서 아이들의 식단이 건강하지 않은 종류로만 도배되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음식점 어디를 가더라도, 어른들의 메뉴는 다양한데 비해 아이들 메뉴는 대체로 샌드위치, 피자, 파스타, 버거, 소시지, 거기다 칩스 (튀긴 감자)는 기본이고, 런치 세트라고 부르는 것 안에는 꼭 달달한 디저트 메뉴, 그리고 단 음료가 포함되어 있으니까.
아이들의 입맛에 맞추었다고 하기에는 참 게으른 메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이건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는 일인가?
꼭 그렇지만도 않다. 영국은 사회 계층에 따라 식습관 역시 달라지기 때문이다.
학교와 음식점에서 아이들을 상대로 주로 제공되는 게 저렇게 고칼로리에 가공식품인 건 맞지만, 만약 아이들이 집에서도 저런 음식을 주로 먹고 있다면 그 집은 워킹클래스일 가능성이 높다.
영국 중산층 (특히 middle/upper middle)의 부모들은 본인들이 건강한 생활 방식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아이들의 식생활에도 진심이다. 탄산음료, 인스턴트식품, 달거나 정제된 간식들은 당연히 가끔 가다가 한 번씩 먹는 음식들이고, 보통 집에서 직접 요리한 음식을 먹이며 과자나 초콜릿 같은 간식류 대신 과일을 늘 쌓아둔다.
그렇기에 영국에서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고 가는 점심 도시락을 보면 대충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얘를 들어 다음과 같은 도시락 내용물은 영국의 웬만한 중산층 부모라면 다들 눈살을 찌푸리고 볼 것들이다.
물 대신 스쿼시 (squash - 농축된 주스 원액을 물에 몇 방울 타서 먹는 음료. 여기서 중요한 건 과일 원액이 아니라 농축된 주스라는 거다. 대충 단맛 나는 물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를 가지고 가거나 심지어 탄산음료를 가지고 간다.
샌드위치에 잼, 땅콩버터, 초콜릿 스프레드 등 단 것이 들어가 있다.
제대로 된 샌드위치 대신 도시락 전체가 케이크, 감자칩 (crips), 초콜릿 바 등등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 외 아침 대신으로 초콜릿 비스킷을 먹는다, 설탕 함량이 높은 요거트를 먹는다, 매일 Mcxxx 같은 곳에 가서 저녁을 먹거나 배달음식, 이미 만들어진 냉동음식을 오븐이나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다, 등등.
이런 일은 영국의 중산층 가정에서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영국의 식문화 자체가 한국과는 많이 다르긴 하다.
아침은 보통 간단하게 먹고, 점심은 샌드위치나 샐러드로 가볍게 먹고, 대신 저녁은 가족끼리 모여 식사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만약 저녁을 가족끼리 식탁에 둘러서 같이 먹지 않고,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면서 먹는 게 일상이다?
대충 슈퍼마켓에서 산 걸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먹는 게 일상이다?
심지어 그렇게 먹는 레디밀 (ready meal)이 슈퍼마켓에서 가장 싸게 파는 종류다?
아니면 오븐에 미리 만들어진 칩스와 치킨 너겟 같은 걸 구워서 내놓는 걸 '요리'라고 부른다?
뭐 이쯤 보셨으면 대부분 짐작하실 거라 믿는다.
그럼 영국의 중산층 가정에서는 뭘 요리해 먹느냐?
일단 다들 요리책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가끔 사람들이 영국은 음식도 정말 별로면서 왜 요리와 관련된 TV프로그램은 그렇게 많냐고 묻는데, 내 생각에는 그 타깃이 이런 중산층 사람들을 노린 게 아닌가 싶다.
원체 음식이 다양하지 않으니 이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게 아닐까.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영국 중산층 가정에서는 남자들도 요리를 한다. 부부 동반으로 만나면 한 번은 꼭 나오는 말이, 'who cooks more?' 이니까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누가 더 요리를 많이 하냐는 거지, 누가 요리를 담당하느냐가 아니다.
물론 가끔 가다가 한쪽이 요리를 전담한다는 케이스가 드물게 나오긴 하는데, 이런 경우는 더 묻지 않아도 알아서 상대방이 이유를 말해준다.
내가 요리를 정말 좋아해서 그렇다, 남편/부인이 해주는 건 도저히 입맛에 맞지 않아서 그렇다, 남편/부인의 요리에는 위험 요소가 너무 많다, 등등.
하우스 파티 때도 비슷하다. 사람들은 슈퍼마켓에서 산 것들로만 초대한 사람들을 대접하지 않는다. 메인 디시는 꼭 그 집에서 요리한 걸로 대접하고, 그 외 역량껏 자신의 필살기인 드레싱 소스나 디저트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집에 초대받아 가보면 그 집의 식생활이나 식습관을 알 수 있다. 주로 어떤 음식을 해 먹는지, 얼마나 요리에 진심이고, 다양한 요리를 할 줄 아는지 등등 말이다.
그럼 위에서 말한 저 연구 결과는 잘못된 건가?
그렇지 만은 않다. 영국에서 경제 불황/위기 때문에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어서 예전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빠진 사람들이 많이 늘었고, 물가가 오르면서 전체적으로 음식값도 올랐기 때문이다. (참고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전만 해도 웬만한 음식점의 메인 디쉬는 10파운드 안팎이었는데, 요즘에는 starter, 전채요리가 그 정도 하고, 메인은 20파운드 정도로 올랐다)
즉, 예전과 비교해서 비슷한 수준의 식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인구수 자체가 줄어들었다는 말이 맞겠다.
그럼 영국에서 지낼 때 봤던 호스트 패밀리는 어떤가? 만약 영국에 살면서 호스트 맘/패밀리와 머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나 역시 경험해 봤지만, 실제로 먹는 음식의 질이 떨어졌으니까.
참고로 말해둘 건 어학연수원생, 유학생들이 머무는 영국의 가정들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눠진다는 거다.
여분의 돈 (income)이 필요한 경우. 혹은 이미 자녀들이 장성하거나 은퇴해서 소일거리로 하는 경우.
두 번째의 경우는 외국 학생들을 대접하는 게 그나마 나은데 (그런데 이미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아 매끼 요리할 체력이 안 돼서 간단히 차려 주시거나, 아니면 심심한 건강식, 혹은 주말에만 선데이 로스트를 해주는 경우도 있다), 첫 번째의 경우는 사실 일반적인 중산층 가정이라고 보기 어렵다. 진짜로 외국 학생들을 좋아하고 문화 교류를 위해 하는 게 아닌 이상, 경제적으로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는 거니까.
그럼 당연히 외국 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식사를 대접할 리 없다. 일단 자신들부터 그렇게 먹지 않을 테니까.
고작해야 파스타에 시판 소스를 뿌려 주거나, 냉동 피자나 싼 레디밀을 데워서 주겠지.
의심스럽다면 친해진 중산층 출신의 영국 친구들 집에 놀러 가보면 된다. 정식으로 초대받아 집에 놀러 온 자기 아이의 친구에게 인스턴트를 대접할, 적어도 중산층 부모는 없으니 말이다. (요리를 못해줄 상황이면 돈으로 해결한다. 대신 아이가 친구와 Mcxxx 같은 걸 사 먹겠다고 하면 대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