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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Apr 01. 2020

계획적(이어야 하는) 인간

닥치니 그리 되더라 

첫째 아이가 태어난 지 3개월도 채 안되었을 때다. 첫째를 임신하고 도시를 떠나 Village라 불릴 법한 한적한 마을에 정원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갔는데, 남편은 며칠째 출장 중이었고, 거실 바닥에 아이를 눕혀놓고 멍하니 정원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아직 겨울이라 하기에는 좀 이른, 여전히 해가 쨍하게 내리쬐는 영국에서 보기 드문 날들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었다. 간간히 정원 손질하는 소리만 들릴 뿐 집안도 집 밖도 모두 조용했다. 그렇게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문득 어딘가 가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들었다. 어디로 갈까, last minute 비행기표가 있지 않을까, 아니면 영국 아무 도시나 가서 그냥 호텔에 가면 안 될까, 어차피 남편이 돌아오려면 며칠은 남았으니 혼자 집에 있는 것보다 그냥 어딘가 다녀오면 되지 않을까.. 그래, 가자. 가면 되지. 


그렇게 다짐을 하고 고개를 돌렸는데, 거실 바닥에 누워서 꼼지락거리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아, 아이가 있었지. 그럼 어때, 모유 수유하고 있으니 먹을 건 걱정 없을 거고, 기저귀랑 갈아입을 옷이랑, 물티슈랑... 이렇게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할 때마다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충동도 하나하나 없어져 갔다. 그리고 나중에는 다 비워진 듯 휑한 허전함과 무력감이 몰려왔다.... 


결혼 전에, 아니, 정확히는 아이를 낳기 전에 나는 꽤나 충동적인 인간이었다. 인생의 묘미는 불예측성이며 인생의 반전은 충동적인 결정에서 온다고 믿을 만큼.. 특히 여행에 있어서는 주위에서 역마살이 끼었냐고 물을 만큼 아주 충동적으로 자주 떠돌아다녔다. 어디 특별한 곳을 가는 것도 아닌데 그냥 무작정 걷는다던지, 네덜란드에 자전거를 타고 여행 다녀왔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충동적으로 중고자전거를 구입해서 이틀 후에 아무 숙소 예약도 없이, 지도 하나 없이 프랑스로 혼자 자전거 여행을 갈 만큼 무모하기도 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모든 걸 계획해서 살고 있다. 처음 계획을 하게 된 계기는 첫째가 태어난 뒤. 남편의 2주 paternity 휴가가 끝나고 첫 출근한 날,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은 아주 긴장했다. 도대체 뭘 해야 하는 걸까. 주위에서는 아주 당연한 듯 엄마인 내가 아이를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알고 있다는 냥 행동했고, 그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난 아무렇지 않은 듯 그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적막한 집에 아이와 혼자 남겨진 나는 도대체 뭘 해야 할지 몰라 괜히 집 안을 서성거렸다. 아이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 입히고, 이제 또 뭘 하나 싶어 괜히 아이를 들었다 놨다 했다가.. 이 아이는 도대체 이제부터 뭘 할까 싶어 Big Brother 프로그램 보는 기분으로 빤히 아이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조용한 것 같으니 그럼 차라도 마실까 했다가 꼭 차를 만들고 나면 우는 아이 때문에 식은 찻잔들이 몇 개씩 쌓이고... 그렇게 어설픈 날들이 며칠 지나간 뒤, 뭔가 계획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때는 잠이 극도로 모자란 데다 스트레스가 정점을 찍어서, 언젠가 한 번은  밤중 수유하다가 갑자기 찾아온 통증에 아이가 깰까 봐 남편을 부르지도 못하고 혼자 바닥에 쓰러져 소리 죽여 울었는데.. 정말 이대로 그냥 지내다가는 우울증에 내가 먼저 쓰러지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하여간 그렇게 강제로 '계획'의 시간 통로에 던져진 나는 두 아이를 키우는 풀타임 워킹맘이라는 타이틀을 딴 뒤로는 아주 만렙의 용사가 되어 나왔다;;; 


그리고 지금,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재택근무로 전환된 지 3주째, 휴교령으로 집에서 홈스쿨링을 한 지 2주째. 남편과 나는 주말에 서로의 work calendar를 펼쳐놓고 매일 오전 8시에서 오후 5시 사이의 계획을 2주간 촘촘히 짜서 서로의 스케줄을 업데이트한다. 그렇게 회사 스케줄이 결정되면, 다음에는 가족 공동 calendar를 열어놓고 일정을 업데이트한다. 8시부터 9시 반까지는 나, 9시 반에서 11시까지는 너, 이날 아이들 점심은 너, 그다음 날은 나, 뭐 이런 식으로.... 그다음에는 아이들 일과를 짠다. 8시부터 9시까지는 아침 먹고 옷 갈아 입고 기본 체조 혹은 요가, 9시부터는 수학, 그다음에는 읽기, 등등... 그렇게 아이들 일과가 정해진 다음에는 각 시간대에 맞는 교육과제들을 준비한다. 수학 시간에 할 수 있는 과제물들 첫째 아이는 이거, 둘째 아이는 이거, 이런 식으로... 


그렇게 하면 우리의 한 주 나기 준비가 끝난다. 그렇게 꼬박 토요일 오전을 써서 계획을 짜고 나서 월요일 아침에 일할 시간이 되면, 난 비슷한 계획 짜기를 내 일에 적용한다. 팀원들에게 내 2주간의 시간표를 알리고, 해야 할 업무들 지시를 순차적으로 내린다. 이런 결과를 언제까지 도출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a, b , c의 일들이 해결돼야 하고, a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x, y, z이 필요하니 그걸 언제까지 해줄 수 있겠느냐, 이런 식으로... 

그래서 그런지 내 이메일에는 bullet point가 자주 등장한다. 가능하면 해야 할 일들이 한 번에 요약되어서 왜 그 사람들이 이메일을 받게 되었는지, 내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게 무엇인지 그런 게 정확히 전달되는 메일 형태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제일 싫어하는 건 아무 계획 없이 주제만 하나 던져 놓고, '자, 얘기해보자' 하는 회의다. 그리고 다음으로 싫어하는 건 다들 떠들기만 하고 아무런 Action point가 없는 회의. 꼭 그런 회의들은 끝나고 나서야 아무런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다시 만나자'하고 회의 요청을 해오거나, 결국은 이메일로 뭘 해달라는 요구가 잔뜩 날아오거나 하니까. 그리고 사람으로 치자면, 자꾸 똑같은 요구를 반복해서 해오는 사람. 매뉴얼을 갖다 줘도 읽지도 않고 또 요청해오는 사람. 특히 그런 사람이 Project management 팀에 있으면 사람을 아주 돌게 만든다 (맞습니다. 아주 개인적인 감정으로 콕 집어 말하고 싶은 그런 사람이 제 주변에 있지요. 아주 진짜 똑같은 프로젝트 파일을 매번 어디에 제출해야 할 때마다 끊임없이 제게 물어오는 사람. 너 A, 진짜 두고 보자, 언젠가 그 엑셀 파일을 내가 날려버리고 말 테다). 


이제는 계획의 삶이 아주 익숙해져 있으니, 마치 그게 내 새 피부인 양 자연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가끔씩 속에서 툭 하고 터져 나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오늘은 파자마 날이다'하고 선언(!)하고 아이들과 뒹굴 리거나 충동적으로 어딘가로 떠날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이제는 접목시킨다 하하). 이제는 아이들이 컸으니 가끔은 그냥 근처 싼 호텔을 잡아 아이들를 태우고 도로여행을 가기도 하고... 물론 지금은 꿈도 못꿀 소리지만..

결론은... 코로나바이러스로 반복되는 집안에서의 육아/일/교육 병행에 계획 수치가 아주 최고점을 찍고 있다는 소리고, 그에 대한 반발로 충동 치수도 올라가고 있다는 소리다... 아직 롤러코스터 초기 같은데...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코너를 넘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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