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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Jun 24. 2020

내가 학계를 떠난 이유

만능 엔터테이너가 되어야 하는 교수

학계를 떠난 이유를 말하기 위해서는 왜 학계에 발을 들였는지부터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학부에서 대학원으로 가면서 전공을 바꾼 케이스다. 즉, 한국에서 전공하던 과목과 영국에서 유학하기로 한 전공이 다르다. 처음에는 그게 바꾼 전공 쪽  취업 전선에 뛰어들기에 좋은 지름길 같아서 선택했다. 영국은 석사가 일 년 밖에 되지 않고, 케임브리지라는 이름값도 있으니, 1년 투자하면 학부 4년 한 것만큼 어떻게든 먹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얕은 계산이 있었던 거다.


그리고 어디 드라마만 봐도 누구 유학 갔다 그러면 다들 금의환향하니 유학 한번 안 가본 입장에서는 막연하게 그걸 기대한 것도 있었다. 나도 유학만 갔다 오면 외국계 기업에 당장 취업하겠지, 뭐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그래서 한국을 떠날 때는 호기롭게, 석사 1년, 인턴이나 취업 준비 1년, 2년 안에 멋진 커리어 우먼으로 돌아오겠다, 뭐 그런 다짐을 하기도 했다.


물론 그게 순전히 내 착각임은 3개월도 지나지 않아 깨달았지만... 


한국에서도 채용시즌이 상반기, 하반기 있는 것처럼 영국에도 채용 시즌이 있다. 보통 여름에 졸업 후 바로 입사할 인력을 뽑는 채용은 크리스마스 전에 미리 다 지원하고, 새해부터 일할 인력을 뽑는 이차 채용 시즌은 보통 부활절이 있는 4월쯤에 시작된다.


난 방금 새 학기 시작해서 따라가느라 정신없는데, 같은 동기들은 벌써 취업 준비에 이력서를 준비하고 있더라. 그래서 덩달아 조급한 마음에 나도 일자리를 알아봤는데, 석사는 정말 별 거 아니었다. 거기다 나처럼 전공까지 바꾼 어중간한 사람에게 열린 길은 더 적었다 (생각해보니 왜 이렇게 마이너 한 길만 걸었는지;;)


그렇게 1학기가 순식간에 지나고, 2학기가 시작되자 좀 더 구체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1년은 생각보다 짧았고, 남아 있는 시간은 별로 없었고, 취업도 여의치 않았고, 그렇다고 한국에 돌아가 봤자 상황이 나아질 리 없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거다.

 

이대로 돌아가면 진짜 일 년 유학비만 날리고 죽도 밥도 안되는 거다, 그럼 생각 끝에 결국 박사과정에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취업을 위해 쏟아부었던 시간과 노력을 연구 계획서를 쓰고, 적당한 코스와 지도교수, 장학금 소스를 찾는 곳에 대신 썼다. 그렇게 초조하게 여름방학 때도 메뚜기 뛰듯 숙소를 바꾸며 기다리고 기다리다 마침내 8월 말에 연락을 받았다.


그게 내 박사과정의 시작이었다.


원래 계획한 건 아니었지만 워낙 글을 읽고 쓰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 박사과정을 시작할 때 나는 또 낭만 같은 걸 품었다. 책으로 뒤덮인 연구실에서 고고히 학문을 탐구하는 교수가 되리라.


물론 이 환상도 박사 일 년 차를 마칠 때쯤에 다 아작 났지만... 


읽는 것과 쓰는 걸 좋아한다고 했지만, 그게 학문에 대한 순수한 지적 호기심과는 아주 질적으로 다르단 걸 그때 깨달았다. 몇 백개가 넘는 논문을 읽는데 멀미날 것 같았다. 내가 손수 택한 주제와 연관된 논문을 읽는데도, 대략 두 칸 구성으로 15-30장 되는 영어 논문을 주야장천 읽다 보면 나중에는 뭐 읽는 것 자체가 싫어지고... 

거기다 내 논문을 써야 하니 그 많은 정보를 어떻게든 잘 버무려서 정리해야 하는데, 그 정보 처리 양과 속도도 문제였다.

 

여전히 영어가 익숙하지 않아서 속독을 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고, 무엇보다 속독을 했을 때 내가 진짜로 그 내용을 이해했는지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논문을 쓰다 보면 인용을 하기도 하는데 필자가 쓴 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다른 쪽으로 오해해서 쓰면 그것도 문제니까..


그래서 읽는 만큼 엄청나게 쓰기도 했다. 논문 내용 요약본, 중요 내용 필사본, 읽은 논문들 주제별로 목차 만들기 등등, 그렇게 보조 자료 외에 논문 쳅터마다 나눠진 폴더 등등.. 어떤 날은 하루에 100 단어도 못쓰고, 어떤 날에는 1000 단어를 쓰고, 그랬다가 600를 버리고 다시 쓰기도 하고...


그런데 그건 그냥 학계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운동 같은 거다. 나 같은 경우 케임브리지에서 학비 마련으로 조교 생활을 했었고, 그 뒤 다른 두 군데 영국 대학에서 lecturer로 일했는데... 대학에서 일하려면 일단 만능 엔터테이너가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대학에 막 발을 디딘 햇병아리 교수 같은 경우에는 당장 두 가지 임무가 주어진다. 강의 준비를 잘해서 학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것, 그리고 열심히 학회지에 논문을 내고 연구 프로젝트 자금을 따낼 것.  


그런데 이 두 가지 임무 중 뭐하나 쉬운 게 없다. 강의 자료야 초반에 한번 만들면 재탕하면 된다고 하는데, 그것도 나름이다. 요즘처럼 온라인 수업이 가능하고 학생들의 선택권이 많아져서 학생들이 소비자로 인식되는 환경에서는 강의 준비도 철저히 해야 한다. 그리고 강의가 없을 때는 최선을 다해 학생들의 질문과 메일에 응답해야 한다. 그런데 이 학생들 수가 몇십 명의 수준이 아니다.


한국은 모르겠지만, 영국에서는 완전 짬밥이 되거나, 혹은 연구비를 막 끌어 모으는  professor 정도가 아닌 이상 최소 2과목 이상을 맡는다. 나 같은 경우 한 학기에 4과목을 맡은 적이 있는데, 학부 필수 과목 2학년 120명, 3학년 전공 선택 과목 60명, 석사 과목 40명, 1학년 선택 과목 20명 등, 강의 시간 외에 대학에 있을 때는 이메일이나 학생들 면담하다가 시간이 다 지나가곤 했다. 방학 때 되면 좋을 것 같냐? 그때는 학생들 과제 채점하다가 다 지나간다...


거기에 2년 동안 학부장도 했었는데, 7개 학과 과정 통틀어 170명이 넘는 학생들을 담당했었다. 이렇게 Course leader 같은 걸 맡으면 할 일은 더욱 늘어난다. 행정 업무는 물론 학생들 개개인까지 신경 써야 하기 때문에..


그럼 연구는 언제 하느냐? 저녁에 하고, 주말에 하고, 방학 때 한다. 물론 연구 Proposal 마감 이런 게 끼면 학기 중이고 뭐고 간에 밤새면서 한다... 거기다 내가 지도해야 하는 석사, 박사 과정 학생들 논문도 틈틈이 읽어서 제때제때 피드백해줘야 한다.


가끔 대학교수는 대학원생에게 다 맡기고, 출퇴근도 제멋대로에 방학 때면 꿀 빤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은데, 영국처럼 대학원생과 지도 교수의 관계가 진짜 말 그대로 '연구자'와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되는 환경에서는 대학원생을 맘대로 부리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거기다 가끔 학부 담당 조교가 있긴 해도, 역시 교수가 알아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대부분이라서 시간이 없다. 


그렇게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일을 하는데, 그렇다고 막 뭔가 보상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해야 할 것들은 많고, 학생들 피드백이 안 좋거나 입학생 수가 줄거나 그러면 위에서 막 쪼아대고, 학생 중 한 명의 불만 섞인 목소리에 그간 해왔던 모든 것들이 우르르 흔들릴 때도 있다. 물론 학생들의 불성실한 수업 태도라든지 결석일수라든지 그런 것도 가끔은 지도 교수 탓으로 돌릴 때가 있으니 알아서 멘탈 잡고 견뎌야 하고...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학기 중반쯤 되면 심하게 앓기 시작했다. 인후염에 걸려서 목이 나가기도 하고, 기관지 쪽으로 계속 문제가 생겨서 꼭 일주일 정도는 일어나지도 못하게 아팠다. 재작년에도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끙끙 앓다가 그런 생각을 했다. 


도대체 내가 뭘 위해서 이러고 있는 걸까? 시간의 융통성 때문에 학계를 선호한 것도 있는데, 융통성을 대가로 내 시간이 정말 갈려 들어가고 있었고, 학기 중에는 내 아이들을 볼 시간도 제대로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매년 반복되는 패턴이 답답했다. 조금 더 견디면 승진의 계단을 밟아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그 길이 까마득해 보였고, 가는 길이 너무도 고달팠다. 그래서 방향을 틀었다. 


학계를 떠나서 공무원이 된 지금. 일의 양은 예전과 비교했을 때 별 다르진 않다. 방학이 없으니, 이건 뭐 쉴 틈 없이 굴러 돌아가는 고속열차 같은 기분인데, 그래도 감정 소모가 크지 않아 도리어 편하긴 하다. 무엇보다 정해진 시간보다 더 일하면 그만큼 환불받을 수 있다는 것도 좋다. 아니, 누군가가 날더러 너무 오래 일했다고 말해주는 게 좋다. 대학에 있을 때는 마치 24/7 영업하는 편의점처럼 불이 꺼져 있는 걸 나무라는 목소리가 더 컸으니까. 




그냥 개인적인 경험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제 학문적 열정이 그 정도밖에 안된 거겠지요. 


한국 학계의 현실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의견 나눠 주세요~ 그리고 지금도 대학의 어둠을 밝히며 일하시는 모든 연구자분들과 교수분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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