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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Jun 29. 2020

학계에서 살아남기

살아남을 방법도 다양하긴 하죠 

전에 학계를 떠난 글을 쓰고 나니 왠지 아주 부정적인 말만 한 것 같아 괜히 찔리는 마음에 쓰는 글. 


한국의 학계는 직접 겪어 보지 못해 영국의 학계에서 겪은 경험들만을 바탕으로 쓰는 아주 개인적인 글입니다. 

 



영국에서 유학하고 있거나 특히 박사과정 중이라면 아무래도 누구나 한번쯤은 학계에 남기를 바라지 않을까 싶다. 영국에는 Russell Group에 속하는 24개의 대학 외에도 수많은 대학교들이 있다. 그럼 대학별로 취업할 수 있는 길은 뭐가 있는가. 


1. Research route


연구원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보통 Research assistant > Research associate > Senior research associate의 순으로 단계가 나눠지는데, 연구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특히 박사과정을 마친 이들에게는 가장 무난한 루트 중의 하나다. 보통 연구 프로젝트가 이미 정해진 상황에서 사람을 뽑는 경우가 많은데, 만약 원래 하고 있는 연구 분야와 맞다면 아마도 학계에 진출하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이 아닐까 싶다. 


가장 쉬운 방법은 이미 박사를 하고 있는 대학의 지도 교수, 혹은 같은 학부 교수가 따낸 연구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거고, 좀 더 치밀하다면 아예 연구 프로젝트에서 주어지는 돈으로 Studentship을 얻어 박사와 연구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도 있다. 물론 자기가 진짜 연구하고 싶은 연구 주제가 따로 있다면 그다지 추천할 만한 방법은 아니지만... 


그런데 단점은 모든 연구 프로젝트가 단기라는 거다. 짧으면 1년, 보통 2년, 길어야 (요즘에는 이렇게 긴 연구 프로젝트가 잘 없지만) 5년이다. 그러니 차라리 연구 쪽으로 얼른 실적을 쌓아 학계로 진출하고 싶다면 박사 과정 자체를 지원해주는 3년 studentship을 노리는 게 낫다는 말을 한 거다. 

 

이 길로 들어간 친구들은 상당히 불안정한 메뚜기 생활을 한다. 2년 단위로 프로젝트가 마감되니 막바지가 ㄷ되면, 마감하랴 논문 쓰랴 직장 찾느라 정신이 없다. 대부분 2년 후에도 연장이 되곤 하지만, 이것도 정말 상황 나름이라서 보통 3개월 전에 연장되거나 아니면 말로는 '연장될 거야'하면서 정식 계약서 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대학 상황이 안 좋아지면, 프로젝트가 끝나자마자 먼저 잘려나가는 것도 이들이다. 


2. Teaching route 


요즘에는 대학들도 학생들을 더 많이 끌어모으기 위해 경쟁하고 있는 상황이라 강의 쪽에 중점을 두는 곳이 많다. 특히 Russell Group Universities 가 아닌 경우에는, 연구보다 강의와 학생들 피드백에 더 중점을 둔다. 그리고 요즘 추세를 보니 Russell Group 대학들도 교수들이 연구에 좀 더 충실할 수 있게 강의 전담을 따로 뽑는 분위기고... 연구 쪽보다는 진입 장벽이 좀 낮다는 장점이 있다. 대신 연구 쪽처럼 프로젝트 단위로 계약을 하는 게 아니라 대체적으로 과목당으로 계약을 하고, 시간제로 돈을 받는 경우가 많다. 


이것도 예전에는 강의 시간 + 준비 시간, 이렇게 돈을 줬는데, 요즘에는 강의 시간만 계산해서 주는 분위기더라. 이론상으로는 일반 시간제보다 페이가 높으니 그 안에 준비 시간에 대한 급료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말인데... 솔직히 예전에 준비시간까지 다 쳐서 주던 걸 생각하면... 그냥 대학 사정이 안 좋아졌으니 돈 안 주겠다는 소리 같다. 


친한 영국인 친구가 속된 말로 이렇게 표현한 것처럼.... 

"If they pay you bananas, only monkeys will work"


강의를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게 은근히 준비작업이 많이 요구되는 노동이다. 일단 누군가를 가르치려면 자기가 그 내용을 다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아무래도 습득하는 준비기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강의 전문은 강의 내용에 대한 선택권이 없다. 그건 온전히 Module leader인 정규직에 있는 Lecturer들이 준비하고, 강의 자체 (delivery)만 맡길 때가 많기 때문에 남이 준비해놓은 강의 자료를 그걸 준비한 사람의 심리까지 이해해가며 습득하는 건 꽤나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난 강의할 때 대부분 내가 좀 고생스럽더라도 Module leader가 되는 걸 선택하곤 했다) 


그리고 과제 채점. 이게 진짜 사람 피를 말린다. 예전에는 리포트 형식으로 프린트된 과제물을 제출했기 때문에 plagiarism (표절) 단속은 어려웠을지 몰라도 채점할 때 눈이 덜 피곤했는데, 요즘에는 다 온라인으로 제출하기 때문에 컴퓨터 화면을 계속 보고 있어야 한다. 거기다 피드백의 양이나 질도 학생들의 만족도를 결정하는 요인 중 하나이기 때문에 대충 읽고 점수를 줄 수도 없다. 진짜 몇 백개가 넘는 과제들을 읽고 있다 보면 나중에는 눈이 빠질 것 같더라... 이것도 시간제 강사의 경우에는 과제 한 편당으로 돈을 받기 때문에 읽기가 느린 사람이라면 자기 시급이 뚝뚝 떨어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거다. 




그럼 정규직으로 들어간 다음에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일단 영국 대학에서 Permanant로 고용되는 일들은 대부분 Lecturer부터 시작된다. (미국식으로 따지자면 부교수, associate professor, 혹은 professor 교수. 그런데 영국에서는 Lecrurer > Senior lecturer > Reader > Professor의 단계를 밟는다) 


일단 통칭으로 대학 교수라고 불렀을 때 요구되는 일은 대학 특성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1. Russessel Group universities 


이 곳에 속한 대학 교수라면 말 그대로 만능 엔터테이너가 되어야 한다. 연구도 잘해야 하고, 강의도 잘해야 하고, 대학원생들 지도도 잘해야 하고... 그런데 굳이 그 중요성을 따지자면 연구 쪽에 좀 더 중점을 두긴 한다. 매해 일정량 이상의 논문을 학회지에 제출해야 하고, 연구 자금을 끌어 모아야 한다. 그 외 강의에 필요한 건 대학에서 따로 위에서 말한 것 같은 시간제 강사를 통해서 충당하면 되니까. 학회 참여도도 높아야 하고, 학회지도 아무 데가 아니라 별 3, 4개는 되는 학회지에 논문이 실려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아무리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아도 더 올라가기가 사실 좀 힘들다. 


2. 그 외 대학들 


그 외 다수의 대학에서는 대체적으로 2가지의 길이 있다. 연구 쪽으로 파고들어 진짜 Professor가 되는 길을 밟거나 아니면 아예 강의 쪽으로 파고들어 Manager가 되는 길을 택하던가. 


솔직히 대놓고 말하자면 그 외의 대학들은 연구 쪽 보다는 학생들의 수로 수익을 올리는 구조가 많기 때문에 당신이 연구 실적을 낼 때까지 투자하면서 기다려주기보다 이미 실적이 있는 사람을 뽑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내가 논문을 쓰지 않아도 논문/연구 품앗이 활동으로 매해 논문이 몇 개씩 나오는 상황이 아니라면, 내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내 개인 시간을 갈아 넣어야 한다는 걸 곧 깨닫게 될 거다. 시간을 얻어 내려면 내 손으로 연구 자금을 끌어와서 내 시간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럼 두 번째 방법은 뭐냐. 말 그대로 연구에 투자할 시간에 강의 쪽으로 시간을 더 투자하는 거다. 강의 내용 연구, 새로운 과목 만들기, 등등. 그렇게 보통 Course leader/ Module leader를 맡으면서 점점 '관리'쪽으로 경험을 쌓는다. 학생들의 좋은 피드백으로 대학에서 인정받고, 내가 맡은 학부가 잘되면 승진할 기회는 더 많아진다. 그리고 Academic Manager, 혹은 Head of School 쪽으로 가는 길을 물색해볼 수 있다. 연구하는 고고한 학자의 모습은 아니지만 대학도 이익집단인 만큼 잘 경영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고 이런 쪽으로 방향을 트는 거다. 




그러니 Russell Group 대학에 취업했다면 어떻게든 같이 논문을 쓸 수 있는 좋은 파트너를 찾아 시간과 노력을 분배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연구 실적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좋고, 그 외 대학에 취업했다면 방향을 가능한 한 빨리 잡아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게 좋다. 역시 그 외 대학에서 연구 쪽으로 가려고 한다면, 이미 돈을 좀 끌어들이고 있는 교수들과 친분을 빨리 쌓아서 연구 품앗이에 동참하는 게 좋고, 아니면 강의와 학생들에게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예전에는 솔직히 학계는 학문적 탐구를 하는, 그런 순수한 학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몇 년 겪고 나니 학계도 꽤나 정치적인 곳이구나, 하는 걸 절절히 깨달았죠. 


뭐 어느 사회 조직인들 그렇지 않은 곳이 있겠냐만은... 그렇다는 이야깁니다. 학계에 막 발 담근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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