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올라가려는 경쟁
부서의 최고 수장이 사직서를 냈다. 전에 말했다시피 지금 부서가 이제 막 거친 구조조정의 풍랑을 헤치고 나와, 새롭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데, 풍랑의 여파가 생각보다 거셌는지 살아남은 사람들도 배가 잠잠해지자 연달아 이탈하더니... 이젠 그 풍랑을 주도한 수장이 떠나겠단다.
사실 떠나려는 이 수장은 원래 이 부서 담당이 아니었는데, 예전의 수장은 물론 조직 구성원까지 침체를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저 윗 분께서 '네가 맡아라'하고 다른 부서와 바꿔치기한 수장이었다. 그리고 그 수장에게 내려진 첫 임무는 '물갈이를 하라'.
그래, 쉬운 일은 아니었을 거다. 지금의 수장은 첫 직장부터 시작해서 공무원 세계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에 가까웠지만 (경험치로 따졌을 때), 잘릴 일이 거의 없는 공무원 사회에서 그런 규모의 대대적인 물갈이를 주도하는 건 만만한 일은 아니니까. 그녀는 오랜 공무원 생활 때문인지 민감한 주제를 잘 피해 가며 말을 가려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마치 매뉴얼을 따르는 듯한 사람이었지만, 그만큼 자기감정 자체를 표현하거나 자신의 진짜 생각을 드러내는데 인색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녀가 뭔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한다는 걸 느끼게 했다. (그래서 사실 보고서 올리기 가장 힘든 타입이기도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녀를 '알기 어렵다'라고 표현했지만, 그래도 단 하나 알 수 있었던 건, 그녀는 거센 풍랑의 중앙으로 배를 몰고 간 선장으로서, 사람들로부터 꽤나 많은 원망과 미움을 받았다는 거다. 풍랑 속으로 던져진 사람들은 당연히 그녀를 비롯한 수장들을 원망했고, 남은 이들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그리고 그렇게 동료를 떠나보내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항해하는 선장에게 표현하지 못할 원망을 다른 방식으로 퍼부었다. 사람들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익명으로 수장과 부서의 주요 직책을 담당하고 있는 이들을 괴롭혔고, 부서가 이 중앙 기관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에 위에서 지켜보는 눈들도 많았다.
그런 걸 생각하면 그녀가 지쳐서 조직 자체를 떠날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웃기는 건 마치 사극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공무원은 당연히 정년이 보장되기 때문에 연봉의 꽃이 피기 시작하는 고위공무원 자리는 그렇게 쉽게 나지 않는다) 군주(!)의 자리가 비게 될 거라는 소문이 돌자마다 곳곳에서 드러나기 시작하는 은밀한 움직임 같은 거다.
수장의 자리가 비었으니 그 자리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
고위 공무원 세계를 신의 세계라고 따지자면, 신의 자리가 하나 비는 건데, 다른 신들은 그 자리가 얼마나 피곤한지 봐왔기 때문에 진짜 무슨 '사명'따위를 맘에 품은 사람이 아니라면 지원하지 않을 거다. 그러면 외부자가 되거나, 신의 자리가 나기만 기다리면서 내공을 모으고 있던 이무기들 중 하나가 될 텐데, 외부자야 지원서가 담긴 뚜껑을 열기 전에는 알 수 없으니 논외로 치고, 이무기를 비롯한 모든 영물(!)들 사이의 움직임은 이미 시작되었다.
아무래도 가장 유력한 후보자들은 지금의 신 수하의 이무기들. 전에 말했다시피 3명이 있는데, 한 명은 외부자로 공무원 세계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무기의 형태만 갖춘 이고, 다른 한 명은 외부자이긴 해도 공무원 사회의 짬밥은 웬만큼 먹은, 그렇지만 역시 이무기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보에 가깝고, 다른 한 명은 이 조직에서 오래오래 굴러 웬만큼 내공을 쌓았지만 역시 이무기가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마지막 이무기는 신이 될 야망을 가지고 자기가 해야 할 일보다 신을 섬기는 일에 더 열심히라는 소릴 들을 정도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누군가 지원을 한다면 이 이무기가 지원서를 넣지 않을까, 하는 예측이 쏟아지고 있다.
또 다른 움직임을 보자면, 이 배가 풍랑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성공적으로 탈출해서 다른 조직으로 들어간 이무기들이 이걸 기회 삼아 치고 들어올 거라는 예측이 있다. (여기 공무원 세계에서는 한번 승진해서 계급이 올라가면 그 밑으로 다시 강등되는 경우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걸 쉬운 승진의 기회로 이용한 뒤 또 몇 달 뒤에 다른 자리를 찾아 하이에나처럼 떠돌아도 조직의 입장에서는 어찌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 외에 아직 이무기까지 되진 못했지만, 이무기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내공 좀 쌓았다 싶은 영물들이 차례 따위 무시하고 뛰어넘기를 시도할 거라는 예상도 있다. 물론 이건 공무원 사회를 생각할 때 가능성이 극히 드물지만.
여기에 더 웃기는 건, 기회가 나타나고 나니 사람들의 욕망은 물론 그 사람들에 대한 평가도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거다. 이무기 A는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라 인맥이 넓지만 행동을 기대하기 어렵고, 이무기 B는 사람은 좋은데 너무 윗분들 눈치를 보고, 이무기 C는 일은 정말 잘하는데 정이 없고 딱딱해서 사람들이 잘 좋아하지 않고, 이무기 D는 정치색이 너무 짙다더라, 등등...
그런 평가와 더불어 편가름도 보게 된다. 이전에는 그냥 일하는 관계로 만나다가, 이렇게 수장의 자리가 비고 나니 줄타기를 하려는 움직임도 더 선명하게 나타나고..
.......
그 와중에서 아직 영물인 나는 뭘 하고 있는가. 나도 계산을 하고 있다. 아직 판에 끼기에는 어리니, 숲 한 구석에 서서 흘러가는 모양새를 관찰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 돌 하나씩 던져서 사람들의 성향과 그들에 대한 평가을 알아내고, 정보를 저장한다.
이쯤에서 눈치챌 분들은 알았겠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나도 누군가의 계단 역할만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이번에는 판이 어떻게 바뀔지, 그게 또 이 조직에 무슨 변화를 가져올지.. 한두 달 후에는 뭔가 알 수 있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