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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Aug 21. 2020

타협인가 무감한 건가

혹은 생존 방식인가 

친한 친구 T가 아주 열이 받은 체 연락을 해왔다. 

회사에서 실장급인 친구인데 본부장인 S 밑에 그 친구를 비롯한 5명의 실장이 있고, 그중 그 친구와 실장 E가 프로세스 하나를 같이 담당하고 있다. E가 맡은 부서가 프로세스의 전반을 담당하고, 친구 T가 맡은 부서가 프로세스의 후반을 담당하는데, 이번에 E가 떠나면서 새로 채용 공고가 떴는데 거기에 적힌 직책 설명에는 그 자리가 마치 프로세스 전체를 담당하는 것처럼 적혀있다며 화가 난 거다. 


성격이 강하고 고집도 세며, 무시당하는 걸 아주 싫어하면서 원리원칙을 고집하지만, 일처리 하나는 완벽하게 해내는 완벽주의자라 성과가 분명해서 조직 내에서 꽤 인정받고 있는 친구였다. 그런 친구에서 상사가 자신과 제대로 된 의논 하나 없이 이렇게 오해의 요지가 충분한 채용공고를 내버린 건 화낼 만한 일이었고, 이미 친구는 그걸 알자마자 S에게 바로 이메일로 따졌다고 했다. S는 메일을 받고서, 직책 타이틀과 설명은 요즘 마켓 동향에 맞춰서 만들어 낸 거다, 그러니 큰 의미는 두지 마라,라고 친구를 달랬지만, 그래도 T가 못마땅해하자 1대 1 미팅을 요청했다고 했다. 


내일 아침 일찍 있을 미팅에 대한 복잡한 마음으로 내게 연락을 한 친구는 그 미팅이 있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하다가 다시 열 받아했다. 그러며 이건 날 무시한 처사라며, 내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S의 일처리가 얼마나 미숙했는지, S에게 똑똑히 알려주겠다며 이를 갈았다. 


그런 친구를 보며 난 괜히 마음이 불안해져서 조심스레, 


"I hope you are picking a fight that you can win"


하고 말하고 말았다. 그 말을 들은 친구는 말을 멈추며 날 잡아먹을 듯 무섭게 노려봤다;;  


내가 그 말을 한 건 실제로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친구의 성정을 봐왔기에 그 추진력을 아주 높이 평가하지만, 친구는 원리원칙대로 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 늘 민감해했고, 그것 때문에 스스로 스트레스받아했고, 자신이 맞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가끔 과하게 사람들을 밀어붙이곤 했기 때문에. 솔직히 이번에도 그러다가 도리어 상사인 S에게 찍히진 않을지 걱정되었던 거다. 


자신의 방식을 도리어 공격한다고 생각한 친구는 나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며 해명을 요구했고,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친구를 잃을 것 같아 살얼음판에 조약돌 하나씩 던지는 기분으로 조심스레 말을 하나씩 내던졌다. 


솔직히 네 직업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함을 때려 부수는 것도 아니고, 막말로 네 부서의 일도 아니고 네 상관의 일이고 이미 채용공고도 나간 상태인데, 네가 왈가왈부한 들 달라질게 뭐 있냐. 어차피 이기지도 못하고 얻을 것도 없는 싸움이라면 좀 어깨를 내려놔도 되지 않느냐. 다른 사람이 틀렸고 네가 맞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그렇게 날뛴다 한들 세상 사람 모두의 방식을 네 방식대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것 때문에 네 에너지를 이렇게 쓸 필요가 있느냐, 솔직히 이건 싸움을 걸어봐야 네 에너지만 고갈되고, 어차피 바뀌지 않을 결과에 대해 도리어 실망감만 더 느낄 텐데. 그리고 그 실망감이 다시 네 자존심을 생채기 낼 텐데. 등등. (막상 쓰고 나니 조약돌은커녕 돌을 막 던져댔구나;;) 


친구는 침묵을 유지하다 알았다, 생각해볼게,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찝찝한 마음에 시달리고 있다. 사실 친구에게 그렇게 말한 걸 후회하진 않는다. 다만 정의감에 불타서 사회정의를 구현하겠다는 친구에게, '야, 네가 직접 피해 본 거 아니면 그런 작은 건 그냥 눈감고 넘어가, 어차피 네가 다 바꿀 수도 없는데' 하고 말한 것 같아 내가 아주 속세에 찌든 쓰레기 같다는 기분이 들뿐. 


원래 나는 친구의 그런 추진력, 혹은 돌진력을 좋아한다. 가끔 옆에서 보면서 저래도 되나, 하고 마음 졸일 때도 있었지만, 그렇게 불도저처럼 밀고서 기어코 조직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모습을 보자면 나름 대리만족을 얻기도 했다.


반면 나는 아슬아슬하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때마다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 끄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에는 최선을 다하자. 얻을 것 없는 싸움은 포기하고, 얻을 게 있는 싸움은 끝까지 물고 늘어지자' 그런 생각을 기본으로 깔고서 일하고 있다. 내게는 이 방식이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으면서, 손해도 최소한 하는 나름의 타협점이라고 생각하는데, 친구와 전화를 끊고 나니 왠지 내가 아주 세속적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하게 씁쓸해진다. 물론 그렇다고 친구처럼 불도저가 될 용기도, 마음도 없지만.. 


친구에게는 다시 연락을 했다. 아까 그렇게 말해서 미안하다고. 네가 무얼 하든 응원한다고. 그리고 내일 미팅이 잘 되길 바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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