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시작 앞에서
난 다시 널 마주 본다.
넌 긴 유학생활을 마침내 끝내게 되었다고 속 시원해했거나, 아쉬워했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어떻게 남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며 걱정했거나,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눈이 파란 그 남자와의 미래를 고민했거나, 앞으로 갈 길에 대해 들떠했다.
긴 시간이라면 긴 시간이고 어떻게 보자면 짧은 시간을 넌 참 부지런히 살았다. 뭐가 정답인지 몰라 헤매기도 했지만, 너는 선택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마침내 동굴 끝에 다다랐다. 그 동굴의 끝에 네가 무얼 보았는지, 네 앞에 어떤 길이 펼쳐져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지금을 지나 네가 어디로 갈지도 나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건 네가 지나온, 이제는 마무리 지은 네 인생의 한 쳅터다. 그 쳅터를 마무리 짓기 위해 네가 무엇을 했는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비슷한 길을 걸어온 입장에서 그저 짐작하고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네가 일찍 어두워진 비바람이 몰아치는 영국의 밤거리를 걸으며 우울해할까 봐, 이게 맞는 길인지 몰라 혼자 헤맬까 봐. 그럴 때마다 말해주고 싶었다.
“응, 나도 네 기분 알아”
그렇게 다 겪고 나니 이제는 좀 삶이 편안하냐고 네가 내게 묻는다면, 글쎄. 아마 난 어색하게 웃지 않을까.
난 때로 ‘영국 사람’이 아니냐고 오해를 받을 만큼, 한국에서는 외국인이 아니냐고 오해를 받을 만큼, 겉으로는 영국인의 습성을 꽤나 익숙하게 따라 하고 있어 보이지만 안에 있는 건 여전히 나거든.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 난 여전히 타지에서 온 와국인일 뿐이고.
다만 달라진 거라면, 이젠 내가 어디서 온 거냐고 집요하게 묻는 사람에게 웃으며, “Why should I tell you?”하고 반문할 수 있다는 거고, 한국을 모른다는 사람에게 분노하는 대신 ‘너의 무지를 어찌 탓하랴’하고 받아줄 정도의 도량은 생겼고, 나의 다름을 문제 삼는 이들에게 맞설 상황별 대비책이 여러 개 준비되어 있다고 할까?
타지에서 살아남는다는 건 스스로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나를 끊임없이 다르게 규정하려 하고, 그들 눈에 보이는 데로 나를 보려 하니까. 그 속에서 휘둘리지 않으려면 소리치는 법을 연습해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너는 나를 규정할 어떤 권리도 없다"라고.
결국 어느 나라에 살든, 그걸 살고 있는 건 나 자신이니까.
너의 여정은 어땠을까. 그 길이 어떠했든 이렇게 잘 버티고 쳅터를 마무리 지은 너에게 축하의 말을 건넨다.
그리고 한 쳅터의 마지막은 다음 쳅터와 연결된다. 그러니 나는 마지막 말을 네 다음 여정을 위한 또 다른 축복으로 끝내야겠다.
너의 다음 여정도 응원할게. 네가 어딜 가든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