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못나서 그런 게 아니라
박사과정을 밟는 동안 한국의 친구들이나 영국에서 만난 한국분들이 내게 그런 말을 했다.
"여자는 외국에서 석사까지 마쳤을 때가 결혼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릴 때야. 박사하고 나면 가격이 뚝 떨어져"
실제로 박사과정 동안 면접을 위해 만난 한국 대기업의 부회장님께서는 모든 질문의 마지막에 걱정된다는 듯, “자네 결혼은 어떻게 할 건가?” 하고 물으셨고, 박사를 마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동안 만난 한국분들은 농담인 듯 진담인 듯, “공부랑 연애하셨구나. 그래도 결혼은 하셔야죠?”라는 말을 꽤 자주 했다.
아마 이게 나만의 경험은 아니었을 거라 생각한다. 외국에 홀로 공부하러 나온 여자들이라면, 아무리 열심히 공부했고, 그래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어도 꼭 한 번쯤은 그런 안쓰럽다는 눈초리나 조언 혹은 걱정의 탈을 썼지만 결국은 가슴에 생채기 내는 말을 들어봤을 테니까.
보통 석사 이상의 공부를 하러 나오는 여자들은 대개 두 부류로 나눠진다. 결혼을 하고 남편과 같이 유학 왔거나, 아니면 말 그대로 홀로 날아온 케이스.
걔 중에는 가뭄에 콩 나듯 남편이나 애인 등의 지지를 얻고 홀로 날아온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초반에나 그렇지 박사 3-5년 기간 동안 내조를 받으며 무사히 홀로 박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간 분은 거의 보지 못했다. 대부분 그들의 남편이나 애인도 덩달아 공부를 하겠다고 날아오거나, 그래서 같이 마치면 다행이지만, 최악으로는 그들의 뒷바라지하느라 자기 박사 공부는 뒷전이 되고 울며 겨자 먹기로 남편이 박사 학위 들고 금의환향할 때 덩달아 따라 들어가는 케이스도 봤다. 혹은 그렇게 박사과정 도중에 임신해서 학업이 중단되거나, 아니면 먼저 박사를 마쳤음에도 남편 공부가 안 끝나서 취업도 미루고 그저 '내조'하며 기다리는 케이스도 있었고. 이런 경우들이야 그래도 어찌어찌 관계는 지속되어 최소 '싱글' 꼬리표는 달리지 않지만, 애인 두고 홀로 날아왔다가 진짜 공부하는 동안 홀로 되는 케이스도 많이 있다.
한국에서 2년 동안 군대 기다리다 고무신 거꾸로 신는 여자들이 있는 것처럼, 유학 간 여자 친구를 끝까지 기다려 주는 남자 친구를 잘 보지도 못했다. 아니, 상대방이 기다려준다 해도 군화 거꾸로 신듯 여자 쪽에서 먼저 헤어지자고 하는 경우도 있고. 누군가에게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거나, 사랑이 식었다기보다, 그냥 지쳐서 헤어지는 커플들도 많다.
유학 때 하는 장거리 연애의 단점이라면.. 멀리 떨어져서 자주 못 보는 것도 힘든데, 시차까지 있다. 내 나라에 두고 온 애인과 관계를 유지하려면 현지에서의 삶을 어느 정도 희생시켜야 한다. 공부하는 것도 힘든데 그렇다고 애인에게 위로를 얻기도 힘들다. 초반에야 전화든 메신저든 이용해서 연애를 지속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서로에게 위로를 얻기보다 서로에게 짜증 내거나 화내다 전화를 끊는 경우도 많을 거다. 화해하려고 연락하려 해도, 거긴 새벽이거나 일할 시간이고, 메시지에 대한 답은 자꾸 늦게 오고, 한국의 애인을 기다리다 밤을 새우고, 현지에서의 하루는 엉망이 되고.
그렇다고 한국에 있는 애인을 욕할 순 없다. 상대방도 반가워 받은 전화가 갈수록 힘들다는 소리로 가득 차고, 자신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고, 자신은 볼 수도 없고 상상도 되지 않는 그런 외국에서의 생활 얘기도 한두 번이라야 신선하고 재밌지, 그것도 나중에는 지루해지니까. 서서히 공통으로 나눌 수 있는 대화 주제는 없어져 가고, 각자에게 다른 세계가 생기고,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그냥 서로 없는 일상에 익숙해져 가는 거다.
물론 그렇게 혼자가 되거나, 홀로 유학 왔더라도 다른 남자 만나서 공부, 연애 다 잡고 가는 그녀들도 있다. 그럼 그렇지 못한 여자들은 다 매력이 없거나 정말 공부밖에 모르는 외골수라서 싱글인 걸까?
사실 그녀들이 싱글인 이유는...
첫째, 만날 남자가 별로 없다.
한국 남자는 군대가 얽히기 때문에 군 복무를 마치고, 졸업하면 벌써 서른이 성큼 눈앞에 다가와 있다. 석사, 박사 생각하고 직장까지 생각하면 서른 초반이 뭔가, 중반 혹은 후반도 바라본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좋은 사람 있으면 결혼을 아예 하고 나오는 분들이 많다. 부인이 꼭 같이 유학하러 오는 게 아니더라도, 그저 뒷바라지하러 오기도 하고, 아기 교육을 위해 다 같이 나오기도 한다. 아니면, 박사 도중에 한국 들어가셔서 결혼하고 다시 나오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유학길에서 나와 마음도 맞고 미혼인 한국 남자를 찾기는 꽤나 어렵다. 그러다 보니 아예 연하를 만나거나, 외국인과 연애하거나, 여전히 싱글을 고수하거나 하는 거다.
둘째, 만날 시간이 별로 없다.
각 나라마다 대학원 과정도 조금씩 다르고 같은 영국의 대학이라도 그 정도가 조금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영국에서 박사과정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 한국과 달리 지도교수의 입김이 적게 작용한다는 건 좋을 수 있지만, 박사생을 한 사람의 독립적인 연구자로 인정하는 만큼, 논문 주제를 정하고 데이터 수집 방법을 결정하고, 분석하고 쓰는 것 까지 모든 건 자신하기 나름이다.
이렇게 아무도 압력을 주지 않는다는 게 편할 것 같지만, 사실 그게 더 무시무시한 압력을 만들어 내곤 한다. 도대체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지, 옆에서 하라고 부추기는 사람도 없고, 비교할 대상도 없다 보니, 박사 과정 자체가 그냥 혼자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고행길 같이 돼버릴 수도 있는 거다. 특히 한국에서처럼 학창 시절 도서관에 엉덩이 붙이고 사는 걸 습관으로 들인 사람들은 까딱하면 마치 고3 때로 돌아간 마냥 스스로를 더 몰아붙이기도 한다. 거기다 혼자 유학 왔다면, 그리고 그 대가로 직장이든 사랑이든 뭔가를 버려야 했다면, 빨리 학위를 따서 뭔가 증명해 보여야겠다는 치열함마저 더해져서, 다른 것에 신경 쓰는 것 - 설사 그것이 삶의 활력소가 될 수 있는 연애라 해도 - 자체를 사치라 느낄 수도 있다.
셋째, 정작 공부를 다 마쳐도 이미 선택하고 싶은 저수지의 물고기들은 얼마 안 남았다.
물론 홀로 유학 온 그녀들 중에는 돈 걱정 없이 근사하게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도 모르고, 우아하게 유학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고, 한국에서 버티다 못해 도피성으로 떠나와서 이도 저도 아니게 또 버티기를 하다가 중간에 포기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오랜 생각 끝에 힘들게 결정한다.
특히 남들은 다 자리 잡고 하나 둘 결혼하고 아기 가지고 하는 그런 시기에 대뜸 공부하겠다고 혼자 유학을 결심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내 돈, 시간, 에너지 모두 투자해서 학위를 받고 나면, 당연히 그에 대한 보상을 바란다. 꿈에 그리던 직장에서 원하던 일을 하고, 사회적 지위나 학벌을 떠나 그런 그녀들의 노력과 열정을 이해해 주고 앞으로의 삶도 존중해주는 그런 남자를 만나길 바란다. 그런데 막상 그녀들이 준비가 되었을 때 그런 남자를 찾기란 쉽지가 않다.
그녀들이 겪어온 걸 이해할 만한 이들은 벌써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룬 사람들이거나, 그녀들처럼 치열한 유학 생존기를 겪은 싱글남이라면 이제 전투에서의 동지라 할 수 있는 그녀들보다 같이 논쟁할 수 없어도 따뜻한 가정을 줄 수 있는 어리고 순한 여자를 원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치열하게 살아온 그녀들에게도 그녀들의 투쟁과 도전정신을 연모하는 연하남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 연하남이 적어도 제 앞가림은 확실히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녀들은 겁이 날 수도 있다. 이만큼 홀로 서기를 위해 달려왔는데 또다시 누군가의 뒷바라지를 해야 하나 하는 갈등 따위는 겪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남들은 저 많은 물고기 중 왜 하나를 못 잡냐고, 눈만 높아졌다고 그럴지 몰라도, 그녀들 눈에 잡을 만한 걸로 보이는 탐나는 물고기는 별로 없는 거다.
유학 가기 위해 떠나오던 당시 내게도 한국에 남자 친구가 있었다. 처음 사귀자는 말이 나올 때부터 이미 유학 갈지 모른다고 얘기를 해두고 시작된 관계였다. 그런데도 막상 내가 떠났을 때 그의 지인, 후배들은 그를 두고 '대단해요'라고 했다. 어떻게 몇 년이 걸릴지 모를 유학을 그렇게 보내줄 수 있냐고 하면서, 그가 '마음이 넓고 이해심이 많은 남자'라고 했다.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지만, 나는 왜 그가 나를 막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리 칭송받는지 이해할 순 없었다.
결혼한 후 유학 가는 남편을 따라 아는 이 하나 없고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매일 하루를 견뎌야 하는 부인들이 어쩌면 당연하게 여겨지고, 유학 가는 여자를 잡지 않는 남자가 대단해 보이는 사회에서, 홀로 꿈을 이뤄보겠다고 유학을 결심한 그녀들은 열심히 달렸다.
그리고 그렇게 달려 지친 그녀들도 쉴 곳은 필요하다. 남편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했을 때 아내가 따뜻한 밥을 차려놓고 기다려 주길 바라는 것처럼, 그녀들도 사실은 저녁에 돌아왔을 때 '오늘 힘들었지'라고 말해주는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필요한 거다.
하긴 여자가 서른 넘으면 그녀의 학력이나 직업이 뭐가 됐든 무조건 노처녀라고, 저녁에 채소 떨이 팔 듯 시집 못 보내 안달인 사회니, 그녀들의 요구가 좀 과해 보일 수는 있겠지만. 그런 말들에 휘둘리기에 넌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러니 뒤를 돌아보기보다, 아래를 내려다 보기보다 네가 가야 할 길을 쳐다보자. 온전히 네 발걸음으로 만들어진 그 길을. 그리고 그 길 위에 누가 너와 함께 설 수 있을지를 선택하는 건 온전히 네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