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적으로 따진다
유학 오는 사람들이 종종 묻는 질문 중의 하나는 '그 대학 유명하나요? 알아주나요?' 같은 대학의 영향력을 묻는 거다. 인지도라고 하기도 좀 애매한 게, 저 질문 뒤에는 사람들이 그 대학을 많이 알고 있느냐, 라는 것 이외에 '그 대학을 나오면 얼마나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가'하는 질문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저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다. 당연히 옥스브릿지야 워낙 유명하니 저 질문 자체가 필요 없는데, 그 외의 대학에 어떤 선호도나 순위가 있느냐 하고 묻는다면 그것도 좀 애매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도 타임스나 가디언 같은 매체에서 매해 선정하는 대학 순위 같은 게 있긴 하다. 학과별로 순위를 알아볼 수도 있고.
그런데 나중에 직장에서 다 같이 만났을 때 한국처럼 '어디 대학 나오셨어요?' 같은 질문을 통해 대충의 학벌로 서열을 매기는 분위기가 있는가, 하면 그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해봤다. 한국과 비교했을 때 영국에도 학벌주의 같은 게 있는지.
한국이 사회 계층에 상관없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학벌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모두 좋은 학벌을 가지기 위해 경쟁하는 전체적인 학벌사회라고 한다면, 영국은 학벌에 대한 관심 역시 계급 따라 달라지는 선택적 학벌 사회에 가깝다. 어떤 계급에 속하느냐에 따라 학벌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다른 거다.
얘를 들어..
1.
영국은 계급의 세습이 대체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케이스가 아니라면 워킹 클래스에 속하는 아이가 고등교육에 대한 지원을 가족들에게 기대하기 좀 어렵다. 주위에 대학을 나온 사람이 없다 보니 정보를 얻기도 어렵고, 동기부여 자체가 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런데 대학 때 그런 학생들을 면담하다 보면 그들의 학업에 가장 많은 걸림돌로 언급되는 것도 가족이었다.
집에서 과제를 하고 있으면 비싼 돈 내고 학교도 안 간다고 구박한다든지, 수업을 가야 하는데 도리어 그런 거 하나 빠져도 상관없다며 말린다든지, 학위가 밥 먹여주냐고 돈 벌어오라고 한다든지 등등. 어떤 학생은 어머니가 또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임신했기 때문에 배다른 동생들을 봐주느라 수업을 못 온다고 하기도 했고, 심지어 어떤 학생은 약물 중독이던 아버지가 자살 시도를 하고 방세를 내지 못해 집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교수진들 사이에서 긴급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물론 이런 건 극단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계급에 비해 워킹 클래스에 속하는 이들은 학업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덜하고, 그보다 기술/먹고사는 방법 등에 좀 더 관심을 두는 편이다. 정규 교육을 이수하긴 하지만, 학교의 수준 같은 것에 관심을 크게 두는 편도 아니고, 정규 교육이 끝나고 나면 대부분 근처 카페나 슈퍼마켓에서 일을 하거나, 미용이나 기계 등 기술을 배우기 위해 Vocationial training course 등을 밟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식의 교육을 받지 않아도 어린 나이부터 자기 아버지나 삼촌 등을 따라 보일러나 울타리 등을 고치러 다니며 직접 기술을 배우기도 하고 - 실제로 집에 오는 plumber, eletrician, gardner 들은 어린 조카나 아들을 데리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 이렇게 기술을 익히거나 해서 어릴 때부터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나중에 사회에서 대학 졸업장이 없다고 불이익을 당하거나 무시당하지 않느냐, 그런 일은 거의 없다. 도리어 이 사람들이 좀 배웠다는 이들을 보고 'Snobbish'라고 뒤에서 험담할지언정. 그리고 아무 일도 안 하고 어린 나이에 임신해서 정부의 돈을 받으며 먹고 놀거나, gang에 속해서 사고를 치고 다니는 많은 수의 젊은 이들에 비하면 이들은 상당히 존중받는 위치다. 같은 가족 구성원 내에서도 꽤 성공한 축에 속하고.
2.
중산층에 속하는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어떻게 보면 가장 학벌에 민감한 계급이다. 자식의 교육에 관심이 많고, 계급 세습에 그치지 않고 자녀가 가능하다면 더 나은 직업을 얻어 자리 잡길 바란다. 좋은 환경의 State school에 보내려 하고, 정규 교육 후 A Level을 통해서 괜찮은 대학에 들어가길 바라기도 한다.
이렇게 말하니 무난한 한국의 중산층 부모님 같지만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자식이 어느 대학을 가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는 거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자신의 자식이 대학에 가기를, 이왕이면 In Seoul 혹은 SKY에 가길 바라고, 그 사실 자체가 큰 자랑이 되기도 하지만, 영국 중산층 부모들은 자식이 대학에 갔다는 사실 자체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그게 굳이 어디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옥스브리지 같은 경우는,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하늘을 치솟아 입학식 날 어머니가 펑펑 울었다거나, 자꾸 '내 딸/아들은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재학생'하고 소문을 내는 바람에 도저히 부담스러워 고향에 갈 수가 없다는 친구들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보면 한국이나 영국이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3.
중상/상위층에 속하는 영국인들은 출발점 자체가 다르다. 처음부터 대부분 Private school이나 Boarding school에 가기 때문에 노는 무리가 다르고, 그들의 대다수가 실제로 옥스퍼드, 케임브리지로 오며, 그렇지 않더라도 계속 자기들만의 무리를 이룬다.
재밌는 건, 그들도 자식이 어느 대학을 가든, 아니면 가든 가지 않든 신경을 잘 안 쓴다는 거다. 실제로 친구 N은 런던의 부유한 지역 출신으로 그 동네에 부모님 집 따로, 오빠네 집 따로, 심지어 졸업하면서 받은 자기 집도 따로 있었고, 스코틀랜드 출신인 할머니가 에든버러에서 생일잔치를 했는데 BBC의 유명 인사들이 런던에서 올라와 참여할 정도의 대단한 집안 딸이었다. 당연히 모두 Private school을 나왔고. 그런데 그녀는 바로 대학 가기가 싫어서 몇 년간 런던 바에서 일하다가, 여행 좀 다니다가, 뒤늦게 케임브리지에 들어왔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렇게 몇 년 놀았으면서도 케임브리지에 왔다는 거).
이들은 이렇게 좀 쉬었다 가더라도 별로 걱정할 게 없다. 몇 년 쉰다고 재정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 사업을 물려받는 사람들도 있고, 나중에 뭔가 시작하려고 할 때 받쳐줄 재력과 인맥도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런 이들이 다 교육을 마치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서 만났을 때는 어떨까??
결론을 말하자면.... 영국에서는 계급별로 일하는 공간이 다르기 때문에 별로 학벌을 가지고 부딪힐 일이 없다.
한국은 공고 졸업자도, 대학 졸업자도, 석사 졸업자도, 박사 졸업자도, 모두 결국에는 대기업에서 일하길 원한다 - 요즘은 공무원인가? 모든 학벌의 사람들이 한 곳을 원해서 몰리니 다시 경쟁이 발생하고, 그들 사이에 차이를 두자니, 대학 비 졸업자는 대학 졸업자보다 같은 일을 해도 보수나 승진의 기회가 적고, 대학 졸업자들 사이에서도 대학 출신에 따라 또 나뉘는 거다. 따지고 보면 놀랄 것도 없다.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원하는 가치가 비슷하니까. 예를 들어, 보통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이라고 불리는 것들.
그런데 영국에서는 그럴 일이 별로 없다. 왜냐면 벌써 계급에 따라, 학벌에 따라 직업들이 나눠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들이 같은 직장에서 일한다 하더라도, 그 구분은 대략 확실한 편이다. 예를 들어, 대학 같은 경우, Academic staff, Technical staff, Administration staff처럼. 그리고 그 분야에 지원하는 사람들의 학벌도 다르다.
설사 같은 Academic staff (교수, 연구, 강의진) 라 하더라도, 출신 대학을 가지고 사람들 사이에서 패가 갈리는 경우는 드물다. 예를 들어, 내가 런던 대학 출신이고 다른 교수가 서레이 대학 출신이라고 끼리끼리 모이지도 않고, 학벌로 밀어주기를 하는 일도 잘 일어나지 않는다. 어차피 같은 박사 학위 보유자니까.
그런데 가끔 필드에서 따돌림당하거나 얕보이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바로 그 암묵적인 충족 조건에 맞지 않는 사람. 예를 들어, 교수들 모두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거나, 오랜 실무 경험이 있는 사람들인데 갑자기 박사 과정도 다 마치지 못한 사람이 교수로 임용이 되었다? 그러면 당연히 말이 나온다. 자질을 검증받지 못한 사람이 갑자기 승진했다? 당연히 무시하는 말이 나오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 정식 complaint를 넣는 사람도 있다. 공정성에 위반된다고.
그럼 영국에도 어떤 분야에 특정 대학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곳이 있느냐, 하고 묻는다면 그건 아마 정치권이 아닐까 싶다. 그 외 금융권 쪽은 확실히 옥스브리지 쪽이 많이 차지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워낙 전공을 안 가리고 뽑기 때문에 대학과 상관없이 성적, 스펙이 괜찮고 자신감이 넘쳐나고 테스트에 통과한다면 문은 잘 열려있는 편이고. 그리고 어차피 들어가면 학벌이고 뭐고 없다. 그냥 죽어라 일하면 된다.
굳이 결론을 말하자면, 영국에서는 대학 이름만으로 서류 심사에서 떨어지는 경우는 잘 없다. 그리고 채용 공고가 뜰 때도 대부분 지원자에게 원하는 부분들을 세세하게 적어놓기 때문에 자신이 거기에 적합하다고 증명할 수만 있으면 대학 이름 같은 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단 채용이 된 뒤에는 대학 출신이고 학벌이고 없이 그냥 하는 일로만 평가받는 편이고.
다만 한국인이면서, 영국/한국의 학벌에도 불구하고 직업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있다면, 아마도 그건...
1) 대부분의 경우 비자가 해결되지 않은 외국인이기 때문이거나,
2) 설사 비자가 되더라도 한국에서의 학벌은 너무 낯설거나(한국 대학은 그게 서울대라 하더라도 여기선 몰라주는 곳이 많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모르는 사람도 태반이니. 한국의 학점 역시 미국 방식을 따르기 때문에 학점이 4.5중 4.3이라 하더라도 영국인들 입장에서는 그게 어떤 건지 잘 감이 안 잡힐 수 있으니 이왕이면 영국식으로 환산한 것도 덧붙여주자. First, 2:1, 2:2, Third, 이런 식으로), 혹은
3) 너무 고학벌이거나 -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학부를 마치고 석사 정도를 하러 오는데, 석사는 일반직에 지원하기엔 너무 높은 학력이고, 전문직에 지원하기엔 좀 못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국에서 취업하려면 학벌보다는 채용 공고에 맞는 전문성을 키우는데 좀 더 투자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