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병명 : decision disorder
결국 이렇게 할 거였으면서
결혼을 못해, 연애를 못해 고민이라는 친구들과 가끔 이런 이야기까지 닿은 적이 있다.
"연애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나서 사람을 찾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한테 끌리고 좋아져서 연애 관계가 되는 게 더 자연스러운 거 아냐?"
나와 말랑콩떡이와의 첫 만남도 그런 관계의 시작과 비슷했다. 적막한 집안에 고양이가 함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공상 수준일 뿐, 마음먹고 고양이를 데려오겠다 결심한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도 종종 길고양이를 구조해서 메신저에 입양 광고를 올리곤 했던 캣대디 샘이 우리 실에 놀러온 날. 마침 내가 머물르고 있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었다는 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법이다.
캣대디샘이 최근에 엄마고양이를 잃고 앙앙거리는 아기고양이들을 데려왔는데, 따님이 임신중이라 고양이를 더 들이는 것은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와 이번에도 이런 귀여운 애들을 데려오신 거예요? 진짜 대단하셔요."
실은 고양이에 대한 관심은 50프로쯤 담긴 관계 지향적 말하기였다. 자기주장은 잘 못하지만 명랑하게 맞장구치는 것만큼은 자신 있다.
"얘네 둘이 저희 집으로 데려오고 싶네요. 결혼 전에 가족들이랑 고양이 키웠었는데."
실은 15프로쯤의 진심이었는데, 우리 부장님과 캣대디샘 둘 다 입을 모아 데려가면 좋겠다고 하시는 바람에 당장 승낙할 뻔했다. '어, 진짜 데려올까' 하는 마음이 피어올랐다. 다행히 정신줄을 잡고 일단 사진이나 좀 보내주시면 동거가족인 구글이와 얘기해보겠다고 했다.
그날 저녁.
우리 본가에서 고양이랑 하루 이틀 지낸 적도 있으니 구글이에게도 알레르기는 없는 게 확실하고, 공간도 적당하니 당장 현실적인 어려움은 없어보였다. 구글이는 고양이가 귀여워죽겠다며 반기는 기색도, 싫다는 표현도 없었다. 그냥 내가 키우고 싶으면 상관없단다. 온전히 내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
나에게 고양이를 돌봐줄 체력이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교사들이 가장 바쁜 시즌인 3월에는 퇴근하자마자 현관문 바로 앞 찬바닥에 누워 잠든 적도 많다. 씻을 힘도 한 방울 안 남아있어서 잠깐 쉬었다 움직이자, 하고 눈을 감으면 아침이었다.
계속 망설이다 <MBC 스페셜 고냥이>에서 집고양이 평균 수명 15년, 길고양이 수명 3년이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엄마냥이도 없어서 길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싶은 생명인데 함께 잘 지내면 공존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밀린 일이 쌓여있었다. 나로 말하자면 친구들 모임에서 메뉴를 나보고 고르라고 하면 결정을 못하다가 결국 셀프 제비뽑기를 하는 사람. 계속 고민돼~고민돼~하고 침대를 뒹굴고 있는 나를 보고 구글이의 한 마디를 하고 갔다.
"결정을 내리기 힘들 땐, 둘 중 어느 쪽이든 괜찮은 거야."
그 말을 듣자 갑자기 해보자는 생각이 왈칵 들었다. 귀여운 생명체의 20년을 한 번 책임지려 노력해보자. 그리고 바로 캣대디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결정에는 신기한 힘이 있다. 결정을 내려버린 그 순간, 마음에 가득했던 걱정과 스스로에 대한 의심은 사라지고 설렘이 그 자리를 채웠다. 사야 할 물건 리스트를 끝도 없이 적고, 고양이 살림들을 다 어디에 둘지 그려보며 밤을 지샜다.
그렇게 시작된 말랑콩떡이와의 연. 고양이 집사들이 흔해진 요즘엔 뻔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양이들이 자그마한 시절은 너무나 짧고 나는 첫사랑을 시작한 소녀 마냥 이 친구들에게 푹 빠져있기에 시작해본다, 육묘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