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요가 리트릿 숙소에서 머물렀던 3박 4일 동안 한 번의 저녁 수업을 제외하곤 하루 세 번씩 요가와 명상 수업에 참여했다. 정해진 일정이 거의 없는 평화로움의 연속이었다. 점심때 맛집에 가거나 하루 끝에 남편과 근처 바에서 한잔하는 게 아니면 거의 숙소에 있거나 바닷가를 걸었다. 사실 이 며칠만큼은 온전히 디톡스 하는 일정으로 만들고 싶었는데 저녁 먹고 밤마다 맥주 한 잔만 하자는 남편의 유혹에 못 이기는 척 나가는 바람에 간까지 디톡스를 하진 못했다. 여행이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이곳에서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게 아쉬워 남편만 보내고 나만 혼자 여기 일주일 정도 더 있을까 생각도 해봤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말을 꺼낸 건 아니었는데 남편이 먼저 “너무 좋다”, “행복하다” 하며 입버릇처럼 말하는 나에게 자긴 괜찮으니 며칠 더 쉬다 오라 제안했다. 아마 남편에겐 나의 속마음이 너무 투명하게 보였던 듯했다. 하지만 갑자기 즉흥적으로 그런 결정을 하는 게 내 딴에는 너무 이기적이고 의리 없어 보여 그렇게는 못하겠다 했다. 게다가 여행 간다고 냉장고도 싹 비우고 왔는데 남편 혼자 있으면 저녁에 라면 대충 끓여 먹거나 굶을게 뻔해서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우리 남편은 왜 혼자서는 배달음식도 안 시켜 드시는지…)
결국 시간은 야속하게도 빨리 흘러 마지막 날이 되었고 아침 수업 한 번만 남겨놓은 상태였다. 이날 아침 수업 선생님은 이틀 전 오후 수업에 들어왔던 또 다른 여자 프랑스 선생님이었다. 아침에 선생님의 얼굴을 확인하곤 난 이틀 전 아사나 수업을 마치고 명상할 때 들었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떠올렸다. 선생님은 프랑스어에 탁월하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만한 약간의 비음이 섞인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분이었다. 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요가 찬트 부르며 싱잉볼과 스루티 박스 (shruti box)를 연주해 주었는데 영혼을 홀릴 것만 같았다. 가기 전 한번 만 더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는데 딱 나타나주셨다.
마지막 수업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밤사이 잠들어있던 몸을 깨우는 스트레칭부터 시작했다. 맑은 공기와 아침 햇살의 기운을 호흡과 함께 들이마시며 아사나들을 이어갔다. 몸은 점점 더 유연해짐과 동시에 점점 힘이 채워졌다. 어느새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한 시간 반 정도의 아사나 수업이 진행된 뒤 우린 사바사나 자세로 누웠다.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고 있으니 잔잔하게 부는 더운 바람조차도 시원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선생님은 싱잉볼을 울렸다. 소리의 파동이 천천히 물결처럼 퍼져 공간을 채웠다. 두꺼운 책같이 생긴 나무 박스를 여니 풍금같이 깊고 여운이 긴 스루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인도가 배경인 영화에서 들어봤던 소리였다. 그리고 선생님은 악기 소리에 맞춰 요가 찬트를 불렀다. 아… 역시나 다시 들어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부르는 음계들은 단순했지만 그 단순함은 순수했고 진심이 묻어난 소리여서 내 마음속에서도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내가 요가 자격증을 딸 때 배웠던 찬트들은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아마 산스크리트어로 된 만트라를 외워서 불러야 한다는 압박에 중얼중얼 입모양만 대충 따라 했던 것이라 나에겐 진실함이 없었던 이유였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선생님의 것은 여신의 노랫소리 같았다. 마치 뱃사람들도 홀렸다는 사이렌 여신의 목소리가 존재했다면 이런 소리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아쉬움에 선생님의 노래를 녹음했더라면 어땠을까 잠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이어 든 생각은 과연 그 공간, 요가 수련이 없이 내 집에서 편히 소파에 앉아 이 목소리만 듣는다 한들 그 감동이 같을까였다.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노랫소리에 온전히 스며들었던 기억과 감동 그대로, 내 마음속에 나만의 추억으로, 조금은 덜 선명하게 남기는 게 가장 감동적인 방법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여행 중 만났던 멋진 경험들, 이를테면 아름다웠던 풍경, 맛있었던 음식의 맛, 여행 중 읽었던 책의 좋은 내용, 이 모든 것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간직하고 싶지만 시간이 지난 뒤 뒤돌아 보면 정확한 기억보단 그때의 아련한 분위기와 감동이 더 떠오르기 마련이다. 이 감동들은 내 마음속에 차곡차곡 모여 소중한 보물처럼 저장되고 삶이 좀 지칠 때, 누군가 같은 장소에 갔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리고 함께 갔던 사람과 같이 있을 때 늘 꺼내어보는 앨범이 된다.
나에겐 이 노래도, 열흘의 고아 여행도 남편과 함께 평생 꺼내 볼 앨범의 한 페이지가 되어 언제든 꺼내보겠지.
노래는 끝이 났고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된 마지막 수업도 끝이 났다. 완벽한 마무리였다는 개운함과 함께 인생 참 예측 불가하다는 생각이 동시에 교차했다. 어느 날 갑자기 인도에 살게 된 한국인이 인도 여행을 했는데 프랑스 선생님의 요가 수업에서 산스크리트어로 된 아름다운 찬트 노랫소리를 듣고 감동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영적 가르침 이런 것까진 아니었지만 뭔가 파울루 코엘료 작가의 소설 속 한 장면으로 나올 것 같은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라는 생각이 스치면서 찌릿한 전율이 전해졌다.
우리가 여행을 계속하는 이유가 아마 이런 것 아닐까. 틀에 박힌 일상을 벗어나 낯선 곳에 나를 던져 이방인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작지만 새로운 경험들이 주는 감동들에 기뻐하고, 제3의 시선으로 나의 내면을 관찰하며 다시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 작은 도전이지만 늘 크고 작은 보상이 따라오는 것. 적어도 나에게 여행은 그래왔다.
저의 길고 긴 고아 여행 에세이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곧 현지 직송 맛있는 인도 음식 이야기 매거진으로 다시 찾아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