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그녀 덕분에 행복했던 여정
자연 그대로의 초록 초록한 섬과 밝은 표정들의 관광객들이 오고 가는 모습들을 보니 다시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날이 뜨겁긴 했지만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외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거의 동굴 쪽으로 다 와갈 때쯤 끝이 안 보이는 매끈한 돌계단이 마지막 관문처럼 턱하니 나타났다. 마치 쉽게 들여보내줄 줄 알았지? 하고 놀리는 것마냥… 어느 나라를 가든 신성한 곳을 가려면 계단이 필수코스인 것 같다.
계단 초입에 고객의 니즈를 파악한 현지 사람들이 앞뒤로 두 명이 들고 가는 가마같이 생긴 의자를 대기시키고 있었는데 우리에게 호객을 했다. 테니스 연습의 부작용으로 연골연화증이 생긴 나에게 남편이 “저거 탈래?” 물어봤지만 내 돈 주고도 미안한 서비스는 사절이라고 거절했다. 나보다 체격도 더 왜소하고 나이도 많으신 두 분께 나의 무게를 지워드리는 게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의 튼튼한 두 다리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라갔다.
드디어 도착한 동굴 입구에 도착해 티켓을 사기 위해 줄을 섰다. 내국인 40루피(7백원 정도), 외국인 600루피(1만원 정도)라고 써있다. 인도 관광지는 어딜 가나 내국인과 외국인의 입장료 차이가 존재하는데 최소 몇 배에서 많게는 10배가 넘는다. 남편은 인도에서 일을 하는 중이라 거주증 같은 ID 카드가 있어서 주로 남편은 내국인 가격을 내고 나는 외국인 가격을 내고 들어간다.
이번에도 그렇게 생각하고 640루피와 ID 카드를 주고 2장 달라고 했는데 이 ID는 안된다며 다른 종류의 인도 ID를 달라고 했다. 없으면 1200루피를 내라는데 카드, G페이 다 안되고 현금만 된다고 했다. 대부분의 현금은 숙소에 있고 필요할 것 같은 정도로만 일부만 챙겨온 우리는 둘 다 주머니를 탈탈 털어도 현금이 충분치 않자 당황하며 줄 밖으로 빠져나왔다.
인도에선 G페이가 워낙 잘 되어 있다 보니 현금을 쓸 일이 거의 없어 팁이나 스트릿 푸드 먹는 정도의 잔돈으로만 챙겨 왔는데 이미 보트 티켓값도 현금으로 냈더니 입장료를 내기엔 300루피가 부족했다. 이 먼 길을 왔는데 몇 천원 없어서 돌아가기엔 너무 아까워서 발을 동동 구르며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데 어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인도 여성들이 우리에게 수줍게 다가왔다. 그 무리 중 한 명이 살짝 웃으면서 “너네 현금 필요하지? 내가 줄게.” 하면서 현금을 꺼내서 그냥 주려고 하는 것이다.
순간 천사가 나타났나 했다. 한눈에 봐도 우리가 필요한 금액보다 더 많이 주는듯했다. 우리는 정말 고맙다 지금 G페이로 바로 보내줄 테니 300루피만 빌려줄 수 있겠냐 하고 번호를 알려달라 했다. 그랬더니 그 돈을 건네준 여성은 괜찮다 안 줘도 된다 하면서 즐거운 여행 되라고 떠나려고 했다.
곤란한 상황에 빠진 외국인 여행객을 도와주려는 그녀들의 마음이 너무 감사해서 어떻게든 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떠나려는 사람을 붙잡았다. 나는 속사포로 한국에서 왔지만 인도에서 살고 있고 G페이도 쓸 수 있고 우리 남편 여기서 일하고 블라블라… 급발진으로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횡설수설 신원증명을 랩하듯 쏟아내 버렸다. 순간 내가 뭐라 하는 건가 현타가 잠깐 왔지만 친절한 그녀는 생긋 웃으면서 번호를 알려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입장권을 구입하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작은 섬의 돌산을 깎아 곳곳에 신전 같은 석굴들을 만들어놨는데 안에 들어가 보면 힌두교의 시바신에 관한 이야기들을 조각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5, 6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고부조로 표현한 거대한 조각들을 보면 어쩜 그렇게 매끄럽고 정교하게 완성했는지 놀라웠다. 그리스 대리석 조각과는 또 다른 신성하고 우아한 느낌이다.
재미있었던 부분은 여기저기 자리한 시바신의 남근상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평범한 원기둥 조각들이 있길래 제물 같은 걸 올려놓는 단상인가 했는데 남편이 남근상이라고 알려줬다. 우리나라에도 돌하르방이 있듯이 어느 나라에서든 이것은 영험한 기운의 상징인가 싶다. 그래서 그런가 많은 남성들이 그 앞에서 엄지척하며 사진을 찍길래 우리 남편도 그 기운 받으라고 한 장 찍어줬다.
한 시간 정도 동굴들을 둘러본 뒤 배를 타고 다시 돌아가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난 여행’객’이니 불편한 상황을 겪더라도 감수해야 할 때가 종종 있지만 ‘객’이라서 받는 호의도 있다. 아무리 계획을 철저하게 짜고 간다 해도 예상치 못한 상황은 늘 발생하는데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그 여행의 매력이 결정되는 것 같다. 이날도 감정의 기복이 롤러코스터를 탔는데 우연히 받은 호의로 인해 역시나 여행은 할만하다 및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로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