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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박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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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리 Feb 12. 2024

기억하기 싫어서 기록하는 내가 당한 동북공정

그리고 미래 없는 학과에서 유학생으로 살아남는다는 것

크게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으면 그 일이 지나자마자 잊어버리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있었던 일은 잊어버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 의무감이 나를 계속 기억하도록 괴롭힐 것 같아 글로 털어버리기로 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지도교수님의 공연 프로젝트에 강제 참여가 되었고, 친중국파 대만인이자 중국 공연을 전공하는 교수님의 연구용 구색 맞추기식 공연에 한국이라는 이름이 필요해서 내가 배우로 끼워 넣어졌고, 그 과정에서 뿌리 깊은 중국의 한국에 대한 속국적 인식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그저 본인의 논문 소재를 만들기 위해 공금을 사용해 기획되는, 정성도 신념도 한 점 들어가지 않은 이상한 공연에 강제 참여된 지 벌써 세 번째였다. 전부터 내가 가진 한국이라는 이름을 이용하고 싶어 안달이 난 교수님의 여러 제안을 거절해 왔지만, 취준생인 지금 교수님은 추천서를 빌미로 나를 압박하며 이번에야말로 내 한 몸이 가지고 오는 '한국성'을 제대로 뽑아먹기로 작정한 상태였다. 다른 걸 다 떠나 실제로 내 일정이 도저히 공연에 참여할 상황이 안 된다는 점을 설명했지만, 교수님은 내 입에서 자발적으로 긍정적인 답이 나올 때까지 "다 너를 위한 거다"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까지 희생하는데"라는 말만 반복하며 일방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종용했다.


몇 번의 실랑이와 노골적인 협박 끝에 함께하게 된 공연은 설날을 맞아 아시아 다양한 나라의 설날 전통 음식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을 담은 30분짜리 공연이었다. 나 외에 세 명의 학부생이 참여했는데, 베트남계 두 명과 필리핀계 한 명이었다. 내 일정이 바쁘므로 '봐준다'라고 얘기한 몇 번의 리허설동안 교수님은 다른 배우들로부터 베트남과 필리핀의 설날 행사와 음식에 대해 듣고 그에 맞춰 대본을 썼다. 원래 내게도 내 분량을 써오라고 했었는데, 이미 본인의 머릿속에 있던 구상과 내가 써온 내용이 조금 다르자 자신이 쓴 내용으로 완전히 대체했다. 사실 한국계 미국인 대학원생의 설날 모습을 담고 싶은데 자신이 한국계 미국인이 아니니 틀린 내용을 쓸까 봐 나한테 책임을 넘겼던 것이었고, 나도 한국인이지 한국계 미국인의 삶은 잘 모른다고 하니까 포기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쓴 것 같았다.


교수님은 구글 검색에서 나온 한국의 설날 음식 이미지 10가지 정도를 보여주며 이 중 실제로 한국인이 설날에 먹는 음식이 있는지 물어보았고 나는 떡국이 설날 음식이라고 알려드렸다. 그렇게 교수님은 떡국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 자꾸 한국이 설날에 만두를 먹지 않느냐고 우겨서 나는 아니라고 했다. 떡국을 검색하니 만두가 들어간 이미지도 나오더라고 이야기하는 교수님께, 취향에 따라 만두를 넣어 먹을 수도 있지만 그게 설날에 의미를 가지는 요소는 아니며, 설날 음식은 떡국이라고 말씀드렸다. 교수님은 "하지만 중국은 설날에 만두를 먹는데..."라며 불만족스러워했고, 결국 최종 공연에서 한국의 설날 음식이 떡만둣국이라고 소개하기에 이르렀다(떡'만두'국이라며 따로 만두를 강조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또한 그는 이미지 외에 떡국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알아보지도 않았고 "정말 길하군!(It's Auspicious!)"이라는 제목에 맞춰 떡국을 "길한 음식"이라고 소개하며 마지막 장면에 모두가 함께 떡국을 나눠 먹으며 그 '길함'을 공유하는 모습으로 공연을 마무리했다.


모두가 떡국을 나눠먹는 장면이 나오게 된 이유는, 내 배역이 간을 맞추기 위해 큰 솥에 이것저것 재료를 계속 넣다가 양이 너무 많아지는 내용이 있어서였다. 리허설 막바지, 소품을 준비할 때가 되자 교수님은 내게 "정말 떡국에 떡만 들어가는 게 맞느냐"며, 중국은 그렇게 큰 솥에 음식을 만들 때면 무조건 배추가 들어가기 때문에 내가 커다란 배추를 계속 썰어 넣다가 양이 많아지는 것을 상상하고 대본을 쓴 것이라고 말했다. 또다시 내가 배추가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자 난감해하며 교수님은 커다란 표고버섯 봉지를 가져와 소품으로 대체했다.


영어에 익숙한 관객이 언어를 못 알아듣는 상태의 답답함을 경험하는 것도 중요하다-라는 자신의 연구의 주제를 살리기 위해 교수님은 내게 떡국이 들어간 한국의 시를 찾아오라고 했고 그 시의 일부분을 읊는 장면을 넣고자 했다. 공연에 사용할 일부분을 정하기 위해 교수님은 소리를 들어보겠다고 해서 - 내용은 관심 없다고 했다 - 나는 시를 낭송해 드렸다. 성조가 있는 중국어와 달리 한국어의 소리에 이거다 싶을 만큼 귀에 딱 들어오는 부분이 없자 교수님은 시를 읊는 것이니 좀 더 음을 넣어 노래하듯이 다시 해봐라, 왜 다양한 성조를 넣어 시도해보지 않느냐, 라며 한국어의 소리에 특별한 악센트가 없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했다. (참고로 나는 독일어 시낭송 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있는데 그만큼 내가 일부러 제대로 안 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연구의 주제에 따라 내 배역이 어머니와 통화하는 장면은 원래 한국어로 진행되었는데, 듣다 보니 너무 답답하다며 대사의 대부분을 영어로 바꾸자고, 한국어는 그냥 시늉만 하자고 하여 대본에는 아무 말도 안 되는 껍데기식 한국어 몇 단어만 남게 되었다.


다른 배역이 각각 교수님이 모르는 베트남과 필리핀의 설날 문화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는 동안, 나는 교수님이 제대로 된 자료 조사 한 번 없이 대충 중국이랑 비슷하겠지 뭐-해서 넣은 요소, 그리고 내가 아니라고 했지만 믿지 않아 원래대로 진행한 몇 가지만 전달하는 기계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솔직히 굳이 나서서 교수님의 연구를 돕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될 대로 되라지, 다 틀린 것 모르고 하라지, 싶은 마음으로 얼른 공연을 해치워버리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공연 당일, 시작 전 연설에서 교수님은 찾아온 관객을 대상으로 공연의 모든 대사가 각 배우와의 깊은 상담을 통해 나온 것이며 그래서 문화적으로 고증이 된 진실만을 담았다고 홍보하는 것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 관객 질문의 대부분은 대본의 내용이 얼마나 실제 경험에 상응하는지였고, 교수님은 자랑스럽게 나서서 "물론" 배역과 배우의 문화적 정체성이 일치하며, 그것이 우리 공연의 가장 중요한 점임을 강조했다. 아시아의 여러 약소국에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주는 것이 공연의 취지임을 암시하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관객은 눈을 빛내며 이 중요한 프로젝트에 대한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면 교수님은 과연 진짜로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었을까? 자신이 구현한 떡국에 내가 단 한 번도 맞장구친 적이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공연 전날 교수님은 갑자기 내게 와 셰프를 탓하기 시작했다. (이 공연의 포인트는 공연이 끝나면 대사에 등장했던 베트남, 필리핀, 한국의 설날 음식이 3코스로 서빙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셰프와 협력하여 진행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들이 떡국 대신 떡만둣국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무슨 소리지? 하고 넘겼었다. 알고 보니 자신들이 제대로 된 떡국을 준비하지 않았단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교수님은 미리 나에게 변명을 한 것이었다. 셰프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공연이 끝나고 수업이 있어 음식을 보지도 못하고 후다닥 달려 나간 내게 교수님은 서빙된 '떡국' 사진을 보내며 "그래도 꽤 떡국같이 생겼어(It does quite look like tteokguk)"라고 문자를 보냈는데, 정말 빈말로라도 떡국 같다고 할 수가 없는 황당한 비주얼이었다. 맑고 간단한 음식이라는 것까지 믿지 못했는지 주황색 국물에 뭔가 걸쭉하게 잔뜩 들어간 모습이었는데 중국의 여느 탕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겠지만 공연 당일 셰프를 만났을 때 모든 게 이해가 됐다. 셰프도 중국인이었던 것이다. 아시아 여러 약소국에 기회를 준다는 취지 하에 공연에 중국을 넣었지만, 한국이 중국의 일부라고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 나머지 사람은 그들이 생각하는 길한 내용을 떡국을 통해 구현한 모양이었다.




내가 적극적으로 항의하지 않고 그냥 넘기게 된 것에는 긴 역사가 있다. 그 내용을 설명하기에 앞서 중국계 학자들의 이러한 태도가 이례적이지 않다는 부분을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내가 임원으로 몸 담고 있는 아시아 공연 학회에는 늘 '아시아 빅 3'의 지나친 우세에 대한 우려가 있는데 중국, 일본, 인도가 그 '빅 3' 나라들이다. 나를 서포트하겠다는 취지로 한국 공연에 대한 내 발표를 들으러 온 중국계 시니어 학자와 대학원생들은 내 연구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을 내놓곤 하는데, 그들의 코멘트는 늘 "물론 한국이 중국과 다른 나라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동아시아의 정서나 경험이 어느 정도 공유된다는 관점에서 봤을 때-"로 시작하며 중국의 사례를 들고 내가 말하는 한국의 현상들에 대한 의심으로 끝을 맺는다. 이 길 잃은 박사생을 정말로 걱정하며 도와주려는 다정한 마음이 한껏 담겨있음을 느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화가 나기도 전에 우선 너무 혼란스럽다.


논문 디펜스를 4월에 앞두고 있는 지금, 앞서 언급한 지도교수님도 똑같은 말을 하며 내 논문의 가장 핵심이 되는 내 이론의 한 요소를 지적했다. 내 논문은 한국의 공연철학이 현재의 공연학 이론으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고 보고, 한국은 '제국'의 철학을 담은 중국, 일본, 서양의 공연 언어와 근본적으로 다른 이해 체계를 가지고 있음을 설명한다. 그에 따라 한국의 철학을 담은 한국어를 중심으로 현대 한국의 문화적 무의식을 설명할 수 있는 공연 이론 체계를 제안한다. 그렇게까지 설명하는데도 교수님은 또다시, "한국이 중국의 문자를 빌려서 한국에 맞게 변형해서 쓴 것은 알지만-"이라고 시작하고는 "그래도 원래 그 한자가 중국에서 가지는 의미를 살려야 하지 않겠냐, 아무래도 그게 원조니까"며 내가 영어로 소개한 한국어 번역이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중국어 의미에 맞는 다른 단어로 바꾸자고 했다. 다행히 지금 이 지도교수님은 사정에 의해 막바지에 동원된 부지도교수님이기에, 원래 지도교수님이 어느 정도 막아주시기로 했지만, 그래도 어떻게 될지 조금은 걱정이 된다.




사실 나는 지금의 부지도교수님으로 대표되는 우리 학과와의 싸움에 지칠 대로 지쳤다. 우리 학과에는 너무나 많은 심각한 문제가 있고 그건 웬만하면 그냥 네네 하는 나조차도 몇 번을 난리 치며 깽판 치게 만들었는데 결국 돈이 문제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연극학과가 소속된 예술대학은 찢어지게 가난하고 그 상황은 날이 갈수록 더 심각해져서 이제 곧 문을 닫을 것 같다. 당장 어제만 해도 잘 나가던 공연학과가 바로 다음 순간 문 닫는 걸 여러 학교에서 봐왔고 우리 학교는 그에 비해 나름 안정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우리도 문을 닫는 게 코앞이다.


내가 처음 박사과정에 들어왔을 땐 전체 학교 규정을 어긴 큰 규모의 대학원생 노동 착취가 일어나고 있었다. 대학원생들이 아무런 지도도 지원도 없이 한 학기에 학부 수업을 두 개씩 맡아서 하면서 월세조차 못 받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학과에서는 한 수업의 채점, 또는 연구 조교 일을 하면서 그 세 배의 돈을 받고 있던 실정이었다. 대학원 수업은 또 쓸데없이 많이 듣게 해서 개인 연구를 진행시킬 시간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교수님들도 제대로 된 수업을 준비할 시간이 없어서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퀄리티의 수업을 제공하게 되었고, 타 학과에서 들으러 오지 않으니 우리 학과 학생들에게 강제로 여러 수업을 수강하게 규정을 만들어서 대학원 강의 수입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괜한 억측같이 들린다면, 우리가 이 문제를 끝까지 추궁하고 문제 삼았을 때 교수님들의 입에서 직접 나온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란다. 자신들 수입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몇 번이고 들었다. 심지어 교수님 개인 사정까지 들먹인다. (싱글대디에 몇명을 먹여살려야 한다더라, 몸이 어디가 불편해서 힘들다더라 등 감정에 호소하는 내용이다) 그 와중에 개인 연구가 늦어져서 박사생들의 졸업이 늦어지면, 게으른 게 문제라며 더 많은 수업을 듣게 매년 규정을 바꾸고 시험을 추가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졸업이 늦어지면 그만큼 추가된 기간 동안 줄 수 있는 돈이 없어서, 학생들이 그걸 문제 삼을까 봐 어떻게든 제 시간 안에 졸업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졸업에 도움이 되는 취업 서포트, 업무 강도 축소 등의 규정은 한 개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단 값싼 강의 노동과 머릿수 채우기 용으로 써먹은 뒤, 대학원생들이 뭐 하나라도 요구할까 봐,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자신들이 수없이 어긴 학교 규정을 문제 삼고 늘어질까 봐 불안해서, 대학원생을 늘 먼저 공격하려고 노리고 있다. 실제로 임금 문제는 나와 선배들이 협력해서 거의 법정까지 갈 정도로 진지하게 문제제기한 다음에야 다른 학과들과 어느 정도 비슷하게 맞춰주게 되었다. 물론 그래도 절대 그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학과는 그 일을 기억해 두고두고 앙금을 가지고 학생들을 한층 더 적으로 대하게 되었다. 학과 회의에 대학원생을 배제하고 많은 의사결정 과정을 비밀리에 진행하기 시작했다. 우리를 뽑은 또 다른 목적, 즉 머릿수 채우기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보복이 따랐다.


예술대학 밖의 사람을 만나고 교류한 모든 학생들이 예술대학의 문제를 더 잘 인지하고 그에 대한 개선을 요구했기 때문에 우리 학과는 대학원생의 타 대학과의 교류를 어떻게든 차단하고자 혈안이 되어있다. 학제융합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다양한 다른 학과와 교류할수록 발전이 빠른 분야인데, 예술대학은커녕 자그마한 연극 박사과정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어떻게든 가둔다. 그다음 너무나 많은 거짓말과 속임수로 어떻게든 대학원생을 통제하려고 하기 때문에 누구도 믿지 못한다. 대학원생 수가 열 명도 안 되는데 업무 강도 때문에 모두 지나치게 바쁜 데다 우리가 친해지면 노조를 이룰까 봐 도끼눈을 뜨고 경계하는 학과 때문에 서로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도 학생들끼리 기대어 힘을 받기가 쉽지 않다. 학과에 당할 대로 당한 시니어들은 지쳐서 나가떨어져있고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들은 자기도 모르는 새 착취당하고 왜 이렇게까지 힘든지 의아해하며 학과의 비난에 따라 나약한 자신을 탓한다. 당장 눈앞에 너무나 급한 일들이 줄을 서 있어 차분하게 생각할 시간이 없다.


이러한 통제는 동양에서 온 외국인 학생을 많이 뽑으면서 더 심해졌다. 외국인에게는 지원비가 더 많이 든다는 점, 그리고 동양의 위계 문화를 이용하여, 감사할 줄 모르는 배은망덕한 대학원생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원하는 대로 대학원생을 사용한다. 지난번에 동원되었던 또 다른 어처구니없는 공연 프로젝트는 '아시아에 대한 공연은 관객의 눈을 끌지 못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일부러 얼기설기, 제대로 준비 안 된 상태로 홍보도 없이 진행되었다. 교수님은 공연 현황을 증명하기 위해, 나에게 한 마디 언질 없이, 하고 많은 장면 중 내 단독 사진을 싣고 이름과 소속까지 적어 논문을 출간했다.


석사과정 때도 문제는 다르지 않았다. 생계를 위해 의상실에서 일하게 됐는데, 나를 만난 첫날 의상실장은 내 앞에서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외국인 학생이 새로 왔으니 한숨이 나온다"라고 불평했다. 실장은 대놓고 편애하는 몇 명을 제외한 다른 학생들을 돌아가면서 괴롭혔는데 나는 '어리버리한 외국인'으로 찍혀서 툭하면 "그러다 너 국외추방된다"는 말을 하며 갈구기를 일삼았고 자신은 다 걱정해서 그러는 거라며 그저 트럼프 정부니까 자신이 널 조심하게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을 덧붙이기를 잊지 않았다.


특히 무엇이 찔린 건지 내가 기분 좋게 있을 때마다 왜 그렇게 불행한 표정을 짓고 있냐며 "웃어"라고 다그쳤다. (물론 안 좋을 때도 많았는데 실장은 내가 잘 있을 때마다 표정이 별로라며 못마땅해했다) 이번 공연과 비슷한 양상인데, 공연이 가까워지고 리허설이 많아지자 실질적으로 안 되는 일정을 되게 만드는 과정에서 심적 신체적 체력이 딸리는 내가 웃음을 잃어가자 교수님은 이메일을 보내고 심지어 하트를 그린 카드까지 쓰면서 "다 너 좋으라고 하는 일인데 즐겁게 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반복하고 긍정의 답을 요구했다.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고부터 늘 가장 가까운 사람을 믿을 수 없었던 것, 그리고 유학이라는 외로운 길을 걸으면서 학과에 대한 소속감 한 조각 없다는 것이 가져올 수 있는 심리적 불안함, 그리고 박사과정이 가져오는 나에 대한 의심은 내 안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학계에 대한 회의감이 없을 수 없었는데, 부지도교수님을 비롯해 가장 교활하게 "사회 공헌"이라는 미국의 현재 인기 표어를 팔아먹고, 실제로는 그 반대의 행위를 통해 이를 이루어낸 학자들이 결국은 가장 인정받고 성공하는 것, 그리고 나는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작은 기회라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 적나라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공연예술학자로서 당장 졸업해도 몸담을 수 있는 직업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리고 그 미래는 점점 더 암울하기만 하다는 것도 한몫한다.


이번 학기 영화학과 조교를 하면서 교수님과 동료 조교들의 존재만으로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상처들이 서서히 아무는 경험을 했다. 영화학과는 너무나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대학원생과 교수는 당연한 협력관계였다. 교수님은 언제든 조교를 서포트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학과 전체적으로도 조교 사무실과 탕비실, 교구가 준비되어 있단 것, 그리고 그것을 외부인인 나에게도 언제든 당연히 열어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수업에 들어가 학생들에게 당당히 가르침을 전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연극학과에서 강사일을 시작했을 때 학과는 언제든 기회만 생기면 나를 버릴 것이란 걸 알았다. 그래서 뒷배 하나 없는 초짜 강사로 살아남으며 나는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렸고 급기야는 오로지 강사일 때문에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이번학기 5주 차가 지난 지금도 나는 오피스 아워를 하기 위해 조교 사무실에 와 앉는 첫 15분은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 울컥하는 마음을 다스린다. 어떠한 상처가 급격히 아물면서 치고 올라오는 치유의 감정이다. 늘 잔뜩 긴장하고 올려두는 가드를 내려놓아도 된다는 안심의 물결이다. 양심의 가책 때문에 내 눈을 제대로 못 마주치거나 뻔뻔함을 담아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빤히 쳐다보고, 이름도 제대로 부르기 민망해서 "너"라고 손가락질하던 게 우리 학과 교수님들이었는데, 영화학과 교수님은 나를 만난 첫날 정말 오래된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르며 똑바로 눈을 맞추어 주었다. 처음 접하는 영화이론을 너무 잘 몰라서 매주 불안한 마음으로 수업에 들어가면서도 학기가 지나는 게 이렇게 아쉬울 수 있다니 정말 신기하다.


한국 공연 연구를 하면서 중국 학자들에게 치이고, 미국 학자들에게 치이고, 타 학과에 치이고, 내 학과에 치이면서도, 또 희망은 있구나 싶다. 따뜻한 사람 한 명이 주는 에너지가 어마어마하다. 그래도 그동안 죽어라 무언갈 했는데 뭐라도 나눌 수 있는 것이 내 안에 쌓였다고 믿으며 없는 직업을 만들어 나가보자 한다. 한 치 앞이 깜깜하지만 지금의 영화학과가 주는 힘을 받으며 또 한 발짝씩 떼어보고, 이러한 기록을 남기면서, 언젠간 고발하고 언젠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는 힘이 생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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