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터 한국에만 오면 느끼는 어떠한 공허함 같은 것이 있었다. 일 년에 한 번씩 가는 한국이기에 늘 새로움과 익숙함 두 개의 눈으로 한국을 보고 듣고 느낀다. 특히 친구들을 만나 그들의 변화하는 삶의 이야기들을 들을 때면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떠한 답답함과 절망과 같은 감정이 찾아오곤 했다. 그런데 얼마 전 다른 브런치 작가의 글을 읽다가 깨달았다. 그건 인문학의 죽음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김윤진 작가의 "91년생이 본 대한민국의 저출생" (https://brunch.co.kr/@dbswls0145/15)이라는 글이었다.
작년,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을 때, 나는 서울에 서린 죽음의 기운이 결국 집약되어 터진 것 아닐까 싶었다. 밀려드는 서울로의 인구와 끝없는 경쟁 속에서 반복해서 희생되는 젊은이들의 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라고 보았다. 이태원 참사는 여러 이유로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그 충격에 비해 잊혀지고 지워지는 시간이 빨랐다. 그만큼 젊은이들의 죽음이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을까. 이미 우리나라는 불행공화국이며 OECD 국가 자살률 1위니까 말이다. 그리고 늘 내 마음 한 켠을 따라다니는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동화책이 떠올랐다.
<꽃들에게 희망을>(1972)을 생각하면 노란색 표지와 함께, 어디서 왔는지 모를 중고책의 신비함과 낯섦이 함께 떠오른다. 트리나 포올러스(Trina Paulus)가 쓴 미국의 동화책으로, 이야기의 주인공 보라색 애벌레는 충족되지 않는 인생의 무언가를 찾아 헤매다 다른 애벌레들을 쫓아 애벌레로 이루어진 기둥을 힘겹게 오른다. 그 과정에서 노란 애벌레를 만나 깊은 우정을 나누는데, 노란 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을 밟아가며 끝이 없는 기둥을 오르는 것에 회의감을 느끼고 다른 길을 찾아보겠다고 하고 헤어진다. 엄청난 의지로 기둥의 꼭대기에 다다른 보라 애벌레는 맨 위에 아무것도 없으며 내리쬐는 태양이 오히려 그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똑같이 생긴 수많은 애벌레 기둥의 존재를 보게 된다. 그는 기둥을 내려가며 이 사실을 알리지만 다른 애벌레들은 그를 믿지 않는다. 기둥을 내려와 방황하는 그에게 처음 보는 아름다운 나비가 다가온다. 그 나비의 몸짓을 따라 보라 애벌레는 번데기를 만들고 기다림의 시간을 거쳐 나비가 된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온 나비가 노란 애벌레였음을 알게 된다. 두 나비를 보자 그제야 수많은 애벌레 기둥들이 사라지고 다들 나비가 되기 위한 과정에 들어간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때 나는 이 책만 읽으면 그렇게 펑펑 눈물이 나곤 했다. 울면서도 몇 번이고 다시 책을 읽으며 그 울음을 되새겼는데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커다란 아름다움이 그 안에 담겨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그렇게 울게 만들었던 건 책이 보여주는 경쟁사회의 처절함과 허무함이 아니라,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진정으로 닿기 위한 간절한 날갯짓이었다. 노란 나비가 보라 애벌레에게 말없이 몸으로 반복해서 이야기하던 모습이었다. 책에서 말하는 "희망"은 인간과 인간이 닿는 곳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인문학을 희망으로 본다. 인문학은 가장 인간적인 것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기 때문이다.
6년 전 한국을 떠날 때 내 주변 친구들은 대부분 취준생이거나 사회 초년생이었다. 그 이후 6년간 나는 친구들이 취준과 이직과 결혼과 출산을 거치며 그야말로 온전한 사회인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한 마디로 불안정으로 정의될 수 있는 20대의 방황과 노력에서 안정으로 전환되는 30대의 모습으로의 변화를 본 것이다. 안정이란 분명히 좋은 가치, 추구해야 할 가치인데, 안정감을 찾을수록 불행해지는 경우도 많다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깨어있는 즐거움에 반짝이던 친구들이, 직장생활 5년 차가 넘어가면서 생존을 위해 스스로의 뇌를 잠재우고 있었다. 회사란 뇌가 깨어있으면 깨어있을수록, 그들의 능력과 재능과 열정이 빛나면 빛날수록 삶을 고단하게 했고, 결국엔 스스로 자신의 생기를 버려야만 평화를 찾을 수 있는 그런 구조였다. 뇌를 잠재우고 잘 지내면 다행이지, 꿈의 직장에 들어갔는데 버티다 못해 퇴사하는 친구도 속출하고 있었다. 가장 친한 친구는 그사이 극단적 시도를 했고 나를 만났을 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세상으로 다시 들어가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가는 쳇바퀴에 다시 한번 몸을 싣고 있었다.
이건 무언가 잘못되었다.
단순한 어른으로의 성장과 현실타협의 문제가 아니다. 모두가 반드시 인문학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인문학을 찾아 뻗어나가는, 자라나는 생각과 행동의 가지들을 잘라 없애고 뿌리를 태워버리는 지금 사회의 구조는 깊이 병든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죽어나가는데 서울이 약속하는 꿈과 화려함은 계속해서 새로운 젊음들에게 그 죽음의 레이스에 동참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낮은 출생률 때문에 힘들다고 한다. 젊은이들의 죽음을 두고 그러게 왜 허황된 꿈을 꾸고 화려함을 좇는 사치를 부리느냐고 한다. 정말 필요한 건 가장 기본적인 질서, 그거 하나면 되는데 말이다. 잠깐의 간단한 교통정리 하나만으로도 모두가 오고 갈 수 있는데 말이다.
영화 <다음 소희>에서 이 죽음의 레이스에 젊음의 에너지를 소진하고 세상을 떠난 소희는 열 마디 말 대신 자신이 춤추는 모습을 담은 한 편의 동영상으로 유언장을 대신했다. 소희가 전하고 싶은 건 말이 아니라 몸짓에 담기는 것이었다. 경쟁의 세계와는 다른 언어, 즉 날갯짓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단 한 번이라도 진짜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잘라내어지지 않은 형태 그대로 존재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었다.
인문학이 있으면 스치는 인연에서도 내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양분을 얻어갈 수 있다. 고통 속에서도 작은 바람 한 줄기에 미소 지을 수 있다. 일상 속에서 내게 말 걸어오는 작은 존재들과 닿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문학을 사회에서 잘라내는 순간 일상은 빛을 잃고 삶의 가치 또한 바래버린다. 자본주의 안에서 행복은 오직 돈으로만 정의되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자꾸만 뇌를 깨우고 깨어난 뇌는 돈이 아닌 다른 것을 찾아 나선다. 그건 돈의 질서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그 질서 안에서 편안한 사람들을 위협한다. 그래서 인문학은 부정당하고 싹이 잘린다.
인문학은 늘 이야기 속에 숨어있다. 인문학을 찾는 사람들은 자연히 이야기에 이끌리고 지금의 사회에서 그 종착지는 미디어와 오티티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소셜 미디어와 유튜브다. 그러나 오로지 광고를 통해서만 돌아가는 이 산업 역시 돈의 논리에 지배된다. 뇌를 깨우는 게 아니라 재우는 이야기가 더 많다는 말이다.
6년 전 함께 반짝이는 청춘의 힘을 노래했던 대학교 뮤직 비디오 연출팀 친구들은 이번에 만났을 때 내게 공연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주었다. 그때 깨달았는데 내게 공연이란 뇌를 깨어있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말하는 연구적 가치 있는 작품이란 깨어있는 것, 그래서 사유하게 하는 것,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보게 하는 것, 잠들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넘쳐나는 컨텐츠의 시대에 내 시간을 온전히 투자할 만한 작품은 가뭄에 콩 나듯 한다. 명색이 공연예술학자인데 보는 작품 수로만 따지면 나는 대부분 사람들의 발끝에도 못 미칠 것이다.
교육과 철학이 무너진 지금의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기다리는 고도는 인문학이 아닐까. <고도를 기다리며>와 다른 점이라면 고도가 없는 지금 우리의 세상은 고고와 디디의 텅 빈 세상이 아니라, 돈이 신의 자리에 앉아 인간의 삶을 버겁도록 메우고 있는 세상이란 것이다. 자살마저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무철학의 세상이 아니라 낭떠러지로 다 함께 돌진하자는 파괴적 철학만 남은 세상이다.
코로나가 터졌을 때, 나는 한국에 드디어 원격으로 일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전체 인구는 줄어드는데 끊임없이 밀려드는 서울로의 인구이동과 아파트 문제, 미친 집값과 물가와 경쟁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지방분권적 문화의 흐름을 만들 인프라를 구축할 기회라고 보았다. 하지만 감시 외에는 함께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한 기본적인 틀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 그대로, 그저 상사의 불안을 잠재우고 그들의 흐뭇함을 채워주기 위한 대면 노동 강제는 코로나 속에서 노골적으로 이어져왔고, 기회는 날아갔다. 이제는 말하면 입이 아프다. 이 병폐들은 가장 윗선에 앉은 몇 명, 할 일 없이 앉아 젊은 피를 뽑아 마시다가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다 그들에게 돌리고 다른 젊은이로 교체해 버리는, 모든 노동의 열매를 다 빨아가는 그 몇 명의 카르텔 속에서 더 견고해진다. 이 카르텔을 유지하기 위해선 언제든 교체 가능한 젊음의 질서 없는 밀려듦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현혹은 계속되고 죽어도 질서는 도입되지 않는다. 한국에서 아직까지 제대로 된 흡혈귀 호러물이 나오지 않았단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
나는 분노한다. 그리고 그 분노를 글에 담고 학문에 담는다. 내 친구들에게는 내 가족에게는 삶을 삶으로 살 권리가 있다. 그 당연한 권리를 찾는 게 영혼을 말라비틀어지게 하고 숨을 못 쉬게 하고 달리는 차도에 뛰어들게 만들 이유가 없다. 세상이 너무 미쳐 돌아가는 나머지 세상이 정상이고 내가 미친 줄 알고 스스로를 포기하게 만들란 법은 없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꿈을 꾼다. 인문학이 죽은 자리에 희망을 이야기한다. 번아웃이 오고 몸이 나가떨어져도 끈질기게 꿈을 꿀 것이다. 사람을 살리고 나를 살리기 위해서다. 내게는 한국에 돌아와 자유롭게 사유하고 공연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비전이 있다. 피를 다 빨리고 상처받은 채 공연예술계를 떠난 친구가 심어준 비전이다. 그 비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명확해진다. 만나고 이야기 나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주변 인재의 네트워크가 쌓여간다. 결국 한 명이라도 구할 수 있는 건 연대라고 믿는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과 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