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에 잔치라니 가당치 않다고 한 한강 작가의 말을 멋지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코멘트들을 보았다. 그 반응을 보며, 만약 우리가 정말로 한강의 작품을 읽으며 울림이 있었다면, 5.18과 4.3의 아픔을 함께 느끼며 가슴이 먹먹했다면, 한강의 이 말에서 무슨 전쟁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기에, 그것이 왜 그를 심란하게 하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생각했다.
<1948: Creation & Catastrophe>(1948년: 창조와 재앙)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다. (https://www.1948movie.com/에서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나는 올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나름대로 팔로업하고 있었는데, 사실 어떤 행사에서도, 이 문제에 뒤늦게 합류한 내가 상황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설명이 제공되지 않아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영화를 통해 문제의 핵심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건 지금의 학살이 홀로코스트의 잔재라는 것이었다.
5.18과 4.3에 대한 현장연구를 진행하면서 마주친 문서들이 있다. 바로 미국이 관여한, 그리고 해당 나라의 지도자들과 함께 설계하고 추진한, 민족 말살 정책이었다. 5.18도 그러했고, 4.3도 그러했다. 한 지역을 통행이 불가하게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고, 연락망도 모두 끊은 후, 그 안의 사람들을 말살한다. 목적이 있다. 5.18은 군사정권을 유지하기 위함이었고, 4.3은 한반도를 분단하여 미군정을 할 수 있는 남한이라는 기지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집단이 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서류에 서명을 하지 않는다면 합법적으로 정권을 세우거나 유지할 수 없기에, 그냥 말살해 버리는 정책을 취한다. 우리가 <서울의 봄>을 보고 분노의 감정을 느꼈고, 아직도 시체가 발굴되고 있는 제주의 땅을 걸으며 울음을 삼켰다면, 그렇다면 지금 팔레스타인을 보며 어쩔 줄 모르겠는 무력감과 절망과 슬픔과 분노를 느끼는 것이 맞다.
영화가 치밀한 연구와 조사를 통해 보여준 그 문서들이, 내가 5.18과 4.3에서 본 문서와 너무도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민족 말살에 대한 명확한 제안과 승인의 흔적들. 그것을 위한 미국의 무기와 자원 지원. '초토화 작전'(scorched-earth strategy)이라고도 불리는 일명 이 '전술'은 타겟이 된 지역의 모든 것을, 어른 아이 인간 사물 할 것 없이, 모조리 파괴해 버린다는 의미를 지닌다.
Ethnic cleansing(민족 청소)이라고도 하는, '민족'에 강점이 있는 말살 정책은 홀로코스트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전무후무한 규모의 인종 특정 학살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지금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건, 홀로코스트의 분노가 이번엔 다른 민족에 대한 말살로, 즉 팔레스타인에 대한 학살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영화는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매인 유대인들이, 그간 쌓인 분노와 보상심리를 팔레스타인 말살로 표출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팔레스타인이 살아왔고 살고 있는 땅을 가지기 위해, 그 땅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생명들을 말살해 버리는 것이 정의 구현이라는 믿음이었다.
한국의 사회학자 임지현 교수가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라는 개념을 정의한 바 있다. 어떠한 역사적 아픔이 한 민족의 경험 안에 자리하게 되면, 그에 대한 분노와 좌절로 발동한 여러 언행들이 정의 구현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어 상당히 위험한 합리화가 이루어지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개념이다. 사례에서 임지현 교수는, 홀로코스트라는 민족 대말살 상황에서도 일부 독일인들이 자신을 희생자로 프레임 하는 현상을 이야기하고, 한편으로 역사적 아픔이 많은 우리나라의 한의 정서 또한, 위안부를 위하고 정의 구현을 한다는 명목 하에 오히려 2차 가해를 하는 현상을 이야기하는 등 '피해자의식 민족주의'가 구현되는 다양한 상황을 든다. 희생자라는 프레임이 주는 간편한 이분법적 논리, 즉 흑과 백을 구분하고 희생자가 무조건적으로 도덕적으로 옳은 위치에 놓이는 것, 누구에게나 아픔은 있기에 어떤 문제적 상황에서도 말 그대로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 그래서 이 희생자 감성을 건드렸을 때 한 집단을 움직이고 조종하기 쉬워지는 현상을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지적한다.
영화는 홀로코스트로 인해 발생한 유대인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자신이 당한 것을 그대로 타인종에게 재생산함으로써 고통을 전가하고 보상받으려 하는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영화를 보며 무속에서 들은 바 있는 귀신의 속성이 생각났다. '물귀신 작전'이라는 말도, 지박령이라는 개념도, 어느 한 곳에서 사고가 일어나면 이후 그 자리에서 비슷한 사고가 잇따르는 현상도,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은가. 그 이유는 그만큼 우리가 놀라고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 그 한 때문에 귀신이 되어서도 어디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묶여버린다고 한다. 묶인 자리에서 풀려나기 위해서는 다른 영혼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워주어야 하는 것이 이 세계의 원리라고 들었다. 그래서 자신을 대체할 존재를 끌어들여 같은 일을 벌이고, 이로써 희생의 굴레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묶인 자리에서 풀려난다고 해서 온전한 자유를 찾지는 못한다. 당장 그곳에서 풀려나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서둘러 다른 희생양을 붙잡아두고 떠났지만, 여전히 천도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것이다. 그래서 그 영의 흔적들을 모두 불러와 위로하고 빌어주는 굿을 해야 이 희생의 굴레가 끊어지는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라고 이름 지어졌지만 실은 역사적 트라우마의 재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을 말살하고 그 땅을 차지하면, 유대인은 자유로워질까? 이미 그것이 아님을 인지하는 유대인의 목소리도 많다. 그 땅에 서려버린 팔레스타인의 한 많은 영혼들은 이스라엘과 계속해서 함께 존재할 것이다. 이번 일로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 희생자로서의 아픔에 더해 참혹한 가해의 업보까지 안고 그로부터 영원히 시달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한 번 일어난 역사는 되돌릴 수 없으니까 말이다.
이곳 미국에서 뉴욕을 중심으로 한 시위는 점점 거세지고 있다. 엘에이에서도 많이 하는데, 이전에 몇 번 시위를 나가 경험해 본 바 나와는 잘 맞지 않아서 이렇게 뒤로 빠져 있다. 죄책감과 무력감을 느낀다. 내게 주어진 것은 펜과 블로그, 그리고 수업 공간뿐이다. 이번 학기 따라 열심히 잘 따라오는 멋진 학생들을 만나 내 신념에 충실한 강의를 꾸려가고 있는데, 상당히 버거워하는 아이들을 보며, 매 수업이 두렵고 긴장된다. 학생들이 꼭 배워야 하는, 미국 역사의 주요 극작가와 극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아주 치열한 투쟁을 하고 있다. 그것을 가장 솔직하고 온전히 다루는 것만으로도, 학생들에게 불온한 사상을 주입하는 행위로 해석되어 고발될 수 있다. 충분한 비평적 거리를 가지고 다루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그 거리를 유지할 자신이 있었는데, 내가 거리를 유지한다고 해서 아이들도 금방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늘 흔들리고 불안했던 것은 내 수업이 너무 솔직하기 때문이구나,를 알게 되었다. 적당히 재밌고 흥미로운 부분만 꺼내어 보고 가볍게 넘길 수도 있는 것을, 공연인들이 목숨 걸고 만들어낸 작품들에 대한 존중 때문에 그냥 그렇게 다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죽음과 폭력과 꿈의 좌절은 아무래도 대부분 학생들이 제대로 마주하기엔 너무 지치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매 순간 흔들릴 수밖에 없어서, 그래서 나를 지탱해 줄, 뜻이 맞는 학자들의 공동체가 필요하단 걸 느낀다. 이 흔들림 속에서 나의 신념을 지켜, 무뎌지지 않고 날 서있는 수업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지금 내가 팔레스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을 보탤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 같다.
그리고
단단한 위로의 포옹 속에 전해지는 심장의 진동
조심히 머리를 기댄 고양이의 보드라운 배에서 들려오는 꾸르륵 소리
쓰레기 버리러 나갔다 올려다본 하늘에서 마주치는 별
뒤척이는 내 몸에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굳이 온기를 기대겠다는 고양이의 파고듦에서 위안을 받는다.
부디 내게 용기를 천천히 오래 전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