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드리는 기도

by Daniel Josh


2020.06.12 말씀묵상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왜 연약한 나를 사랑하시는가. 주님은. 고귀한 그 영광의 주님이 어쩌하여 나를 위해 죽으셨는가. 진홍같이 붉은 죄를 지닌 나를 부르셔서 왜 의롭다 칭해주시는가. 굳이 그렇게 까지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기도를 하면 성령께서 나의 간구를 친히 아시고 하나님의 귀한 마음으로 바꾸어가시는 것을 경험한다. 성도는 개인적인 힘듦과 괴로움, 사건의 해결을 위해 기도하다가 하나님이 주신 상황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룸을 믿게 되고 주님이 귀하다 여겨주시는 믿음의 고백을 드리는 데 까지 나아간다.

기도를 안한지 꽤 되었다. 그러다 문득 실로암이라는 찬양을 듣고, 찬양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를 안나간지도 오래되었다. 교회는 예배와 공동체라는 기능이 있어서 존재한다고 믿는다. 교회에 나가지 않더라도 신앙생활은 할 수 있고. 성도가 두 세사람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말씀을 나눌 수 있고 함께 기도할 수 있다면 그 곳이 교회라고 믿고있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더더욱 다함께 드리는 예배가 지양되고 있는 시국에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청년 공동체로 모여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하나님에 관해, 하나님을 믿는 삶에 관해 열심히 토의하고 기도하고 감동을 나누었던 때가 생각이 났다. 주님이 귀하게 보셨을 그 공동체를 떠올린다. 마음껏 주님의 예배당에서 뛰놀며 주님을 경배하던 때가 그리운 참이다. 어쩌면 하나님은 예배할 수 없는 슬픔에 대하여 경고하신 것이 아닐까. 예배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주일성수를 지키지않는 모든 그의 백성들에게, 돌이키라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복잡한 생각들이 들었다. 성령이 원하시는 간구라기 보다는 다분히 육적인, 어쩌면 단순한 그리움의 감정일지도 모른다. 이토록 나는 내가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바라는지 잘 알지를 못한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대신해 간구하시는 성령의 중보가 간절해지는 이유다.

주님 나 힘들어요. 이 상황이 해결되게 해주세요. 내가 잘되게해주세요. 내가 돈을 잘 벌게해주세요. 내가 명예롭게 해주세요. 이런 구차한 감정들을 가지고 기도를 시작하다가 결국 끝에 가서는 나는 주님을 사랑하는가? 지금보다더 주님을 더 사랑하고싶다. 나는 아낌없이 주신 그분의 사랑을 더 깊이 느끼고 싶고, 그 속에서 진정한 교제를 나누고싶다. 이런 마음으로 옮겨간다. 그것이 신앙의 진짜 이유 일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어린 양 같아서 흩어지고 불순종하고 무엇을 바라는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나 같은 영혼들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 주님이시다. 그런 주님의 보살핌아래 내가 있다고 느낀다. 나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안에서 놀 수 밖에 없다. 묵상할 수록 더 나의 깊은 곳 영혼의 탄식을 이해하게 되는 기분이다. 주님 오늘도 내가 나의 영혼을 돌볼 수 있도록 나를 깨워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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