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위와 위선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2020.06.30
[롬16:19]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인에게 인격은 소중히 관리해야할 과제다. 사람이기 때문에, 위협적인 본능이 수면위로 올라올 때가 많다. 나에게 피해를 입히는 사건이나 사람에게 악한 감정을 품게되는 것 말이다. 나를 괴롭게 한 그 상대방이 죽여마땅한 대상이 되는 것은 아주 삽시간에 벌어지는 일이다. 때로는 그런 마음과 말의 표현이 ‘사이다‘라는 평가를 받고 통쾌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그건 매우 위험하다.
사람은 너무 약하고 악하다. 세상이 악하고 나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준다는 말도 물론 맞다. 그러나 상처입히는 세상에 똑같이 상처를 내며 공격성을 내비치는 삶의 방식은 옳지않다. 특히나 그리스도인은 선함으로 악함을 이겨내야 한다. 이런 말들이 옛날에는 그저 당위로만 들렸었다. 왜 그리스도인은 손해보면서 살아야 하나. 희생해야 하는가. 싫은데 싫다고 표현 못하고, 억지로 헌신을 해야하고. 하지만 신앙에 억지라는 것은 없다. 예수님이 오신이유이기도 하다. 신앙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주님을 온전히 믿게되면, 나에게 죄는 무엇인지, 선함은 무엇인지 친히 가르쳐주시는 성령을 만나게 된다. 나는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순종조차 나의 의지가 아닌 성령의 이끄심이다.
이제는 사려깊음에 대해 생각한다. 인생들이 함께 이 땅에 발붙이며 살아가는 동안 어떤식으로 공존해나가야 하는지. 우린 모두 개인주의자인 동시에 거대한 사회 공동체의 일원이다. 내가 겪는 고통의 크기는 누군가에게 분노로, 또 혐오로 투사되기도 하지마는. 꼭 그러리란 법은 없다. 내가 겪는 고통이 남의 고통을 공감해 행동하게 만드는 일이 되기도 하니까. 삶은 부메랑 처럼 되돌아오는 것이고 아무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최소한의 지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간절하고 배고팠을 때 나의 고통을 경험으로 타인의 고통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한다. 다분히 이성적인 논리의 과정을 거쳐서도 이런 결론이 나오는데, 하물며 성령이 나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어떨까.
성도가 선한데는 지혜롭고 악한데는 미련하길 원한다고 말씀하신다.내가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 이기심을 위해서는 잔인함을 불사하는 인격몰락은 타인을 고통에 빠뜨릴 뿐 아니라 본인의 삶 또한 좌절스럽게 만든다. 어느 순간 부턴가 나 혼자 잘되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관두었다. 내 삶이 연대하는 타인들과 함께 아름다웠으면 한다. 힘겹게 살아가지만 희망을 가질수 없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이루어놓은 재산과 명예가 다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필히 생각하게 될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받은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내 한몸 건사할 정도로 살아서는 안된다. 복음이 전해질 수 있도록 필요한 곳에 필요를 채워주는 능력이 나에게 있기를 기도한다.
신앙의 궁극적 목적은 거룩이라고 하는데, 그 거룩에 대하여 아는 것이 많이 없었다. 왜 거룩을 쫓아야 하는지, 그것은 어떤 모양인지, 잘 모르겠었다. 지금도 역시 잘 모른다. 다만, 위선이라고 생각했던 행동들, 말들, 거룩으로 포장된 사생활들에 대하여 상처받고 돌아섰었지만. 그것이 단순 사람들의 시선에 비추이는 장식같은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목표이고 사람은 그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다. 나에게는 거룩이 필요하다. 주님의 영광 깃들임이 필요하다. 내 죄성이 아주 붉기 때문이다. 그것이 곁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파괴하고, 나 자신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사랑의 모양을 더욱 묵상하는 오늘 하루가 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