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순간에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
2020.07.15 말씀묵상
[왕하7:1-2]
1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2 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아람군대가 이스라엘을 둘러쌌다. 그렇게 포위당한 채로 이스라엘 성읍내에는 먹을 것이 떨어져 급기야 자기 자식을 삶아먹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왕은 하나님의 사람을 불러들인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원망한다. 직전에 아람군대를 치지 않고 그냥 돌려보냈기 때문에 이런 사건이 벌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언뜻보면 합리적인 추론인 듯 보인다. 그러나 인생은 합리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자연법칙이 자연스런 인과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한다기 보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다수의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에 감히 추측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헤아릴 수있는 것은 신 밖에 없다. 인간은 지금도 여러 변수들을 통제한 후에야 과학적 인과법칙을 추론 및 검증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남탓 하지 않는다. 환경탓하지 않는다. 물론 구조적인 문제를 무조건 자신의 탓으로 돌릴경우 근본적인 문제파악과 해결이 어려울 것이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자신을 돌아본다는 말이다. 우리는 모두 죄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것을 위해 그리스도가 오셨다. 어쩌면 매일 내가 이렇게 말씀을 읽을 수 있는 이유는 나의 무거운 죄성 때문이다. 주님의 개입하심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해결되지 않은 죄의 문제는 계속해서 곪아들어가게 마련이다.
결국 본문에서처럼 왕은 자신의 죄를 돌아보지 못하고 미루고 미루다가 사태가 심각해지고나서야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고, 더불어서 그를 원망하기 까지 한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다. 우리의 죄성에 따른 매번의 실수와 닮아있다. 죄를 지으면 기본적으로 주님을 피하고싶어하고, 죄의문제를 감추려들게 된다. 그리고 그 심각성이 커져 어떤 외부적인 문제로 표출될 때에는, 그 죄의 책임에 대해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주변의 탓으로 전가시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문제상황을 해결해주신다. 바로 내일까지. 그리고 상처난 백성들의 마음을 돌보아 회복시켜 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장관은 그 회복의 예언에 코웃음을 친다. 그러자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내일 네 눈으로 그 광경을 보게 되겠지만 너는 그것을 먹지 못할 것이라. 취하지 못할 것이라.
마지막의 순간에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 하나님을 의지해서 내가 회복되든지, 아니면 여전히 죄의 무게 앞에 무릎을 꿇고 노예처럼 살아가든지. 별별 시도를 다해보고나서도 무용한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왔을 때에 위 본문의 장관처럼 시니컬 할수 있다. 이제와서 뭘 해본들 무슨 달라짐이 있으리요. 코웃음을 친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 사고자체가 하나님의 통치에 입각한 세계론으로 정립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실수다. 애초에 나는 이 땅에 태어나기를,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다. 그리스도와 교제하기 위함이 나의 존재 목적이고, 끝없이 죄와 싸우며 복음을 전하며 거룩을 닮아가는 것이 나의 존재목적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지금의 사태는 무엇보다도 나의 거룩하지 못함이, 나의 죄의 문제가 초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때문에 나의 죄의문제로 가리워진 눈이 주님의 은혜로 뜨일 때에 그 긍휼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맞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보는 앞에서 그 은혜를, 그 구원을 놓치게 될 수 있다.
시니컬해지지 말자. 교만하지말자. 말씀을 읽어도 변화하지 못하는 나 스스로를 보고있다. 인격적으로 삶적으로, 나의 삶은 완고한것만 같다.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기 위해, 내 육체의 생각은 모두 비워야 한다. ‘내가 여태 봐왔지만 - 아무 소용이 없었다.’라는 식의 변명이 입에서 슬금슬금 기어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때에까지 내가 나의 틀에 머물러 주님의 말씀에 코웃음 치는 비극은 없어야 겠다. 나의 방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와 뜻이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 나의 시선과 생각을 깨뜨리기 위해 오늘도 말씀을 묵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