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가 없으면 만들면 된다

새 언약과 회복, 그리고 올바른 삶

by Daniel Josh


2020.09.19 말씀묵상
[겔11:17-21]
17 너는 또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에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모아 내고 이스라엘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다 하라
18 그들이 그리로 가서 그 가운데의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것을 제거하여 버릴지라
1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20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21 그러나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따르는 자는 내가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회복의 말씀을 주시는 주님, 주님은 늘 나를 회복시키시며 동시에 새 언약을 맺으신다. 이전에 죄악으로 물들어 주님을 기억하지 않고 주님을 배반했던 날들을 기억하지 않으시고 악한 죄를 멸하시며 나에게 다시한번 다가오신다.

오늘 새벽 나는 침상에 누워서 생각했다. 무기력했다. 나는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이용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의욕이 도무지 생기질 않았다. 어제는 해야할 공부, 운동, 독서 등을 다 내팽개쳐두고 게임과 만화를 보았다. 인생이 영원히 지속되는 지루한 시간이라고 여기면서 하루를 낭비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통념상으로 낭비라고 일컬어지는 행위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편치않았다. 왜 일까? 인생에는 정답이 있는 듯 보였다. 그것이 불만스러웠던 것은 하루이틀일이 아니다. 새삼 생각하는 것도 지겨워서 그저 누워있었다.

나는 그토록 원했던 이른아침, 충분한 잠을 자고 일어나있었다. 무엇이든 하면 되었지만, 아무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나는 왜 생산적인 일을 도모하기 위해 몸을 일으켜 움직여야 할까? 삶이 목적하는 바는 그런 것일까? 그럴싸한 이유가 있다면 조금 쉬웠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마음이 충분히 그럴듯하다고 여겨질 이유는 없었다. 신앙은 당연히 뒷전이었다. 왜 나는 열심히 살아야 할까.

베로니카의 경우와 정반대였다. 아니 베로니카가 초반에 자살을 결심했던 순간과 거의 일치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매일의 삶속에서 무언가를 욕망하고 그걸 위해 열심을 다해야하는 삶 그자체가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왜 사람들은 다 한 방향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억척스러워지는 걸까. 시니컬하게 현실을 도피하면서 핑계를 댔던 것일까.

다이어리를 펼쳐들었고, 느끼는 기분들을 적어내려갔다. 아무것도 하고싶지않다고. 무엇이든 할 수있는데도, 생산적인 일을 꿈꾸며 눈빛을 빛내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낭비하는 삶을 되풀이 하는것도 싫었다. 그냥 이불을 덮고 아무것도 없었던 일처럼 잠이나 자고 싶었다. 사람은 그렇게 무기력해지고 죽어가나보다. 이불을 덮고 꿈을 꾸면, 꿈은 아무 맥락이 없이 흘러가다가 깨어나면 금방 잊혀진다. 그것들은 현실이 아니었다. 하면서.

그렇게 제대로 살고싶지 않은 이유를 열심히 늘어놓는 동안에, 게임화면을 보았다. 카트가 구석에 처박혀서 움직이지 않았다. 순위는 꼴찌였다. 의무적으로 수행해야하는 미션판수만 채우면되므로 순위는 무관했다. 그런데 문득 카트가 벽을 계속해서 들이받는 그 모습이 내 모습과 같이 보였다. 그깟 경기 제대로 키를 조작해서 달리면 1등을 할 수 있었다. 내 삶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순위에 집착한다. 잘 사는 것, 건강하게 사는 것,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중요하다고 여긴다. 사실 그깟것, 잘 통제된 정신을 가지고 잘 통제된 삶을 살면 가능하다. 인생을 진창에 던져버리자 않고 잘 관리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삶을 종종 진창에 던져버리곤 한다. 왜 그러한가?

일종의 반동심리다. 사람은 살 이유를 찾을 수없다면서 자신의 가치가 부정당하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삶의 국면 위로 뜨거운 분노를 쏟아낸다. 그는 진정 살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걸까. 정반합이론은 정과 반이 합을 이루고 또 다시 그것이 정이되어 반을 만나 합을 이루게되는 과정이다. 삶의 긍정이 또다른 부정을 만나 균형을 이루게 되듯, 삶은 다면적인 인생의 감상으로 이루어져있다. 통제된 삶을 사느라 욕구불만을 겪던 자아에게는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해방을 어느정도 허용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 해방이 방종을 넘어 낭비가 되면 다시 적절한 통제를 가하여 주는 것이다. 삶은 놀랍도록 단순하게 유지 관리 될수 있다.

왜이리 장황한 말들을 늘어놓는가. 막연하게 나의 죄가 나를 망가지게 만들었다는 단순한 묵상은 이제 나를 공감하지 못하게 만든다. 원인은 분명히 있다. 본질적인 원인이 표면적인 원인을 만들어내게 되는 그 근간을 조금만 생각하면 간파할 수 있다. 새 언약을 받은 백성은 다시 새 인생을 산다. 율법을 지키며 통제되고 관리된 삶을 산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목적을 이루어가며. 이유가 없으면 이유를 만들면 된다. 그것이 나의 유익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육적으로 건강하고 올바른 것을 추구하면 영적으로 건강하고 올바른 것을 추구하게 되는 것 같다. 무엇이 먼저라기 보다도 지금의 나에겐, 신앙은 건강이다. 건강이 곧 신앙이기도 하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의 삶을 다시 정상궤도로 돌려놓아 주심에, 나는 겸손하며 이 은혜를 받아들여 주님을 따르는데 더욱 집중해야한다. 기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려고 한다. 다시 넘어지더라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내 세계 모형 안의 신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