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예술로
나는 아픈 것이 아니라 부서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한 살아있음이 행복하다.
-프리다 칼로(1907-1954)
"나는 아픈 것이 아니라 부서진 것이다."
프리다 칼로의 한마디를 읽었을 때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당연히 나와 칼로의 아픔은 비교도 할 수 없다. 그녀의 고통은 정신뿐만이 아니라 육체까지도 산산조각이 났었으니까. 하지만 모든 것을 초월한 듯 담담하게 쓰인 듯한 한 문장을 보고 나는 무너져 버렸다. 그녀를 위해 울었고 나 때문에 울었다.
나도 아팠다. 한시도 편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프면서도 아프다고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몸이 아프면 누군가의 연민을 살 수 있지만 정신적으로 아픈 것은 병자 또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취급을 받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닌 척을 해야 했다. 또 너무 어려서 의학적으로 마음의 병을 병원에서 의사가 진단을 하는 줄도 몰랐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책이나 기사를 읽으면서 내가 몇 가지 병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것을 추측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나의 몸속으로 들어와 나를 대신해서 온 세상에 대고 아주 큰 목소리로 아픈 게 뭐 어떠냐고 이건 이상한 게 아니라고 소리쳐 주는 것 같아 시원해서 울었고, 그냥 부서진 것뿐이라고 말해주는데 그것은 내가 조금 예민한 사람이었던 것뿐이라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아서 내일 죽어도 후회가 없을 정도의 안도감에 또 울었다. 부서진 것뿐이라... 사실은 본인이 얼마나 많이 아팠으면 남들 보기에 아무렇지 않게 보이려고 저런 표현을 생각해 냈을까 싶기도 해서 마음이 먹먹했다.
그녀의 삶을 책으로 읽고 나니 마치 직접 만나 본 사람처럼 생생하게 다가왔다. 옛날 옛적 어딘가에 아픈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은 살아보려 노력했다. 자신은 아팠지만 아픔이 그녀의 삶과 예술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그 와중에도 그림과 글을 남겨 나 같은 사람에게 위로가 되어 준 게 고마워서 아주 펑펑 울어버렸다.
나와 같은 우울을 지닌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물론 우울한 사람들이 몇 있었다. 보통 시기를 타는 사람들이었다. 그럴만한 일들이 있기 때문에, 이유가 있어서 며칠 혹은 몇 주 동안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점차 회복하는. 하지만 나의 우울은 내 몸안의 피가 흐르는 모든 핏줄 위에 덮여있는 듯 분리되지 않았다. 지속적이고 제거되지 않아 안고 가야 하는 일부분이었다. 다행인 것은 우울이 파도처럼 철썩철썩했지만 마을을 전부 집어삼킬 정도의 거대한 움직임은 아니었다. 커질 때도 있다면 작아지기도 했으며 작았던 것이 한순간 매우 커지기도 했다. 나는 그냥 그렇게 태어난 사람 같았다. 여하튼 주변의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나의 어두운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밝음은 건전한 것 어두움은 불건전한 것이라는 공식이 은연중에 학습을 하도록 학교와 가정은 나를 가르쳤고 사회는 그를 계속 훈련해나가야 성공하는 삶으로 이끌었다. 어두컴컴한 감정을 가진 사람의 내면을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람들의 흉을 사는 고약한 일이며, 사람들에게 밝은 에너지를 줘도 모자랄 판에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피로를 주고 피해를 주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자격도 없는 사람이 기껏 세상에 오게 됐으니 아무도 괴롭히지 말고 얌전히 있자. 그러다 때가 되면 조용히 사라지겠지'
사람들과 지내는 것이 힘들었다. 그런데 사람들과 안 지내는 것이 더 힘들었다. 사람들과 안 지내는 사람은 말 그대로 사회 부적응자, 패배자였다. 나는 사회적으로 관계를 못해서 소외되기 시작하면 삶은 실패하는 것이고 그 게임에서 패배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럼 내 인생은 크게 망해 집안의 문제거리가 되고, 부모에게 까지 손가락질이 갈 것이고 불효자 이자 실패자 까지 되는 것은 아주 무서운 일이었다.
'그들과 잘 못 지내더라도 아예 안 지내는 것보다는 낫지.'그래도 이 생각 덕분에 최소한의 관계는 유지해오며 살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사람들과 관계를 시작하면 오래가지를 못한다. 그나마 몇몇 사람들은 끈이 놓아지려고 할 즈음에 잘 지내냐는 연락을 먼저 해왔다. 그 패턴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고 상대에게 미안할 만큼 반복이 되면 그때 나는 마음을 조금 열고 먼저 연락을 하기도 한 것이 지금의 친구라는 범위에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다. 못난 나를 이해해주고 나와의 관계를 끝까지 지켜내 준 고마운 사람들이라고 할까. 그렇지 못한 경우에 사실은 내가 상대를 안 좋아해서 인연을 더 이상 이어 나가지 못했던 것이 절대 아니다. 내가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단순하게 안부를 묻는 것조차 버거울 때가 많다. 그래서 생각 나는 사람이 있어도 먼저 하기보다는 상대가 먼저 해주기를 숨죽이고 기다리는 편이다. 연락이 오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적극적으로 연락을 해 볼 생각도 않는다. 그냥 각자 자신의 생활을 지켜내며 제 위치에서 잘 지내는 것이 좋은 거지 하는 마음과, 또 그것을 정말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그동안 나를 만나온 사람들은 아마도 나를 밝은 사람, 활발한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진짜 내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혼자 있을수록, 축 쳐져 있을수록 그 지경에 이른 나야말로 진짜 나에 가깝다는 느낌을 참 많이 받아왔다. 그러나 막상, 나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사실은 엄청나게 어두컴컴하고 조용한 사람이에요 이라고 말하면 모두가 도망갈 것이라고 생각되어 사실이 탄로 나기 전에 내가 먼저 도망을 쳤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사는 거지.
언젠가 지하철을 탔는데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무리가 지하철 한 칸을 거의 점령하다시피 우르르 몰려 타더니 완전히 분위기를 압도해갔다. 그중 누군가가 음악을 지하철이 떠나가라 아주 크게 틀고 그들은 그 안에서 깔깔 신나게 웃고 떠들고 과한 몸짓을 취하고 아주 그냥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그들은 지하철의 다른 사람들에게 제대로 피해를 주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보며 눈살이 찌푸려지지 않았다. 공공장소에서 이기적인 행동임에도 불쾌하기보다는 오히려 신기해서 넋을 놓고 보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세상엔 나만 존재해라는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떠들어 댈 수 있는 거지?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없는 것처럼 마치 자신들만 있는 듯이 행동하는데 나는 속으로 정말 대단하다 싶었다. 저러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 한 번쯤은 나도 해보고 싶었다. 완전히 나와 동떨어진 사람들임을 느꼈다. 아니 내가 그들과 아주 동떨어진 사람임이 서글펐다.
나는 왜 저들처럼 감정을 과감하게 표출하지 못하는 걸까. 평범한 20대의 모습도 나는 도대체 왜 평범함에 해당되지 않은 사람으로 그 시간을 거쳐왔는지 알고 싶었다.
혹시 어쩌면 함께 미쳐줄 친구들이 없었던 걸까. 내가 밀어냈던 그 사람들과 유지를 잘했었다면 내게도 그런 두려울게 하나도 없는 20대가 있었을까.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괜찮다고 되뇐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기껏 다가온 사람들까지 거부했던 나였기 때문에 이제 와서 불만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면서부터는 괜찮다고 애써 주문을 걸지 않았다. 그림만큼이나 나를 잘 이해해 주는 친구가 없었다. 울어주기도 , 웃어주기도 내가 바라던 대로 함께 미쳐주기도 했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한 살아있음이 행복하다"
라고 했던 프리다 칼로의 말에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 수 있다면 이렇게 남기고 싶었다.
'저의 경우에는요, 살아 있음에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행복하게 되었어요. 고맙습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화가들의 삶과 그들의 문장이 나의 진정한 친구가 되주었다.
어느 날은 ‘살아있음이 행복해서 그림을 그려요.’라고 말 할 수 있는 날도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