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까다로운 입맛의 소유자
반려견을 키우기 전, 내가 보았던 강아지들은 사료 그릇을 내려놓기만 하면 허겁지겁 사료를 몇 초 만에 쓱싹하는 아이가 대다수였다. 어린 시절, 외삼촌 집에서 키우던 요크셔테리어 돌돌이는 내가 사료를 집어 들기만 해도 앞발로 어서 달라는 표시를 하고 꼬리를 치고 그야말로 오두방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쁨이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 예상했다. 아니 기쁨이는 사료를 와구와구 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덩치였다. 태어날 때 이미 200g 후반을 돌파했고 6마리의 동배들 중에서도 가장 크게 태어난 아이여서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덩치만 보고 예상한 것은 나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사실 우리 기쁨이는 세상 식탐이 없는 강아지 었던 것이다.
기쁨이가 먹는 사료는 [내추럴 발란스], [힐스]이 두 회사에서 나온 라인이다. 2-3 달이면 한 가지 사료에 쉽게 질리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바꿔줘야만 드신다. 나의 하루는 기쁨이의 밥으로 시작해서 기쁨이의 밥으로 끝이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주 아기 강아지였을 때에는 불린 사료만 줘도 잘 먹는가 싶었는데 물론 그때에도 달려들어서 먹지는 않고 몇 입에 나누어 꼭꼭 싶어 먹긴 했다. 그런데 반년 정도 지나고 나니 이 녀석의 까다로운 식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의 식사시간을 여기에 글로 적어 내려 가 보겠다.
우선 사료만 내려놓으면 수십 번 냄새를 맡아가며 사료 한 알과 눈치게임을 한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코, 그리고 날름거리면서 혀 끝으로 느껴지는 맛을 철저하게 분석이라도 하겠다는 듯, 이 안에 독이 들었나 안 들었나 살피는 기미상궁처럼 꽤 오랫동안 먹을 듯 말 듯하다가 드디어 먹으려나! 싶으면 매정하게 퇫! 뱉고 냉정하게 돌아선다. 정말 이 모습을 매일 보고 있노라면 속에서 가끔은 용암이 끓어오른다. 밥그릇을 사이에 둔 채 어르고 달리고 칭찬도 해가며 어떻게든 먹이려고 하는 내 모습에 헛웃음이 날 때도 있다. 나의 온갖 애교를 심드렁하게 바라는 기쁨이는 뒤늦게 [그래. 애썼으니 내가 먹어준다] 선심이라도 쓰듯 사료를 조금씩 먹어보기 시작한다. 먹긴 먹는데 세상 맛없게 먹는다. 보는 나도 입맛이 떨어질 정도로 말이다. 하도 억지로 먹는 것이 딱해서 (밥 주고 애쓰는 건 나인데 왜 기쁨이가 딱한지 모를 일이지만..) 그 이후 사료에 토핑을 올려주기 시작한다.
사료에 삶은 닭가슴살, 혹은 습식 사료를 얹어서 주면 이제껏 본 적 없는 적극적인 발걸음으로 그분이 등장하신다. 저 멀리서부터 이미 냄새를 맡아서인지 아주 기대에 찬 모습으로 위풍당당하게 밥그릇 앞에 선 기쁨이. 아무리 맛있는 토핑으로 유혹을 해도 기쁨이의 [기미상궁놀이]는 여전히 계속된다. 냄새를 맡고 또 맡고.. "기쁨아. 엄마 독 안 넣었으니까 진짜 좀 먹어라" 하는 나의 하소연과 함께 이 새로운 토핑의 안전점검이 끝이 난다.(드디어!!) 한 입 조심스레 먹어본 기쁨이는 점점 먹는 속도가 붙기 시작하고 그토록 먹이기 어려웠던 사료가 천천히 기쁨이의 입 속으로 사라진다. 한 입씩 사라질 때마다 나의 입꼬리도 같이 실룩거린다. 자식이 밥을 잘 먹으면 부모 배가 절로 부른다는 말이 뭔지 알 것만 같았다.
그. 러. 나. 우리 기쁨이의 입맛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지. 한 동안 토핑과 함께 사료를 잘 먹는가 싶었는데, 이 녀석의 잔머리가 발동을 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이제 기쁨이는 사료 사이사이에 있는 토핑만 골라먹기 시작했다. 강아지의 혀가 그렇게 미세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걸 기쁨이를 통해 알았다. 정말 기가 막히게 사료를 헤집어서 쥐알만 한 토핑을 싹싹 골라먹는다. 그가 떠난 자리는 나의 노력이 무색하게 사료만이 그득하게 남아버렸다. 그 뒷골 당기는 풍경에 나의 한숨과 고민이 다시 늘어나고 말았다.
예전에 TV에서 밥 안 먹는 아이가 나오면 나는 '밥 안 먹이면 치워버려야 돼. 부모가 저렇게 따라다니면서 먹이면 오히려 안 먹는 습관을 더 키우는 거야' 큰소리를 떵떵 쳤다. 하지만 이제 내가 그러고 있었다. 사료그릇을 들고 다니며 손에 사료 몇 알을 꼭 쥔 채, 집요하게 강아지를 쫓아다니는 견주. 안 먹겠다고 요리조리 구석으로, 베란다로 자꾸만 이동하고 또 이동하는 기쁨이. 우리의 숨 막히는 레이스는 아침과 저녁 매일같이 이어졌다. 한 알이라도 먹여보겠다고 우르르 까꿍을 무제한으로 외치며 애원하는 견주의 모습이 나라니. 유난스러운 부모님을 흉보던 나는 밥 먹이기에 온갖 수단을 다 쓰는 견주가 되어가고 있었다. 보다못 한 남편은 내게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안 먹으면 가차 없이 치워 버릴 것!
강아지가 안 먹으면 사료를 치워버리면 된다. 그런데 이 녀석이 하루 종일 배를 곯을 것을 생각해서 많은 견주들은 결국 간식이라도 주고 자꾸 무언가를 섞어서 먹이게 되고 만다. 그런데 자꾸 그렇게 해버릇하니 서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남편의 말이 옳다. 이대로 가다가는 내 머릿속은 강아지 밥 먹이기로 꽉 차 있을 것이다.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 보자!
여느 때처럼 기쁨이는 기미상궁으로 빙의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사료 그릇 앞에 우뚝 앉았다. 나 또한 절대로 이 녀석에게 넘어가지 않겠다는 굳은 마음으로 그 앞에 허리를 곧추 세우고 앉았다. 숨 막히는 기싸움. 내가 사료를 권하거나 입에 넣어주지 않자 이 녀석도 이상한지 갸웃거리더니 가차 없이 일어나서는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방으로 사라졌다. (하.. 그 엉덩이가 얼마나 얄미운 지 팡팡 치고 싶을 때도 있다) 다시 부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내가 마음속으로 정한 10분이라는 마지노선을 넘어섰으니 나는 결심대로 바로 그릇을 치워버렸다.
기쁨이의 고집은 우리 상상 이상이었다. 아침 이후 쫄쫄 굶은 기쁨이는 저녁이 되자 배가 고픈지 집구석구석 냄새를 맡으며 먹을 것을 찾기 시작했다. 정해진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기대에 차서 내려놓은 밥그릇! 우린 당연히 기쁨이가 허겁지겁 먹을 줄 알았다. 그러나 웬걸. 이 녀석은 배가 고픔에도 불구하고 사료 따위는 먹지 않겠다는 듯 또다시 뒷걸음을 쳤다.
아오!!그놈의 뒷걸음질!! 제발 앞으로 가서 한 입만 먹어보라구!!
기쁨이의 [사료 안 먹어] 농성은 무려 24시간을 훌쩍 넘기고 다시 다음날 저녁이 되고 나서야 끝이 났다. 그 시간 동안 우리 앞에서 공복토를 두어 번 했을 때는 순간 마음이 동할 뻔했다. 그런데 공복토를 하더라도 절대로 간식이든 뭐든 주지 말라는 말을 기억하고 애써 꾹 참았다. (이 순간이 가장 외면하기가 힘들다.) 늦은 밤이 되자 기쁨이는 우리 부부가 눈길을 두지 않고 있을 때, 바닥에 두었던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나지막이 오도독오도독 씹는 그 소리를 얼마나 듣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틀간 기력이 없던 녀석의 눈에 드디어 생기가 돌고 입맛을 다시면서 내 앞으로 슥 앉는다. 밥 먹이는 자와 안 먹으려는 자의 치열한 기싸움의 승리자는 나였다.
그 이후부터 기쁨이는 식사 시간이 되면 되도록 정해진 시간 내에 식사를 끝낸다. 물론 가끔 사료의 맛이 지겨운지 거부할 때도 있는데, 그 때면 나는 밥그릇을 치워버리고 다음 식사시간까지 일절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요즘도 사료 위에 데친 채소를 열심히 다져주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안 먹으면 치우기에 익숙해진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여전히 나는 도치맘이고 기쁨이는 기미상궁이지만, 과거에 비해 우리 서로 한 발자국씩 진전을 했다고 생각한다. 기쁨이는 고집을 꺾었고, 나는 정해진 규칙에 맞추어 행동한다. 또다시 기쁨이의 농성이 시작될지 모르겠지만, 그때도 지난번처럼 굳은 마음과 태도로 밥 치우기를 해보리라.
아.. 견주가 된다는 건, 정말 쉽지가 않다. 그래도 우리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기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