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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조 Jan 01. 2024

관음과 이입의 딜레마

수잔 콜린스의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 



예전에 읽었던 헝거게임 시리즈에 대한 향수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이 소설은 꽤나 재미가 있다. 


우선, 지독하게 굶주리는 스노우의 일상적인 하루로 시작되는 이 소설의 도입부는 스노우에겐 미안하지만 헝거게임 독자들에겐 묘한 반가움을 일으킨다. 헝거게임 1권 첫 장면과 캣니스가 헝거게임 추첨날 느끼는 허기에 대한 묘사를 떠올리게 하는 도입부이지 않은가. 나는 주인공이 어떤 결전의 날에 눈을 뜨고, 그럼에도 비참한 일상을 피하지는 못하는 도입부를 볼 때마다 헝거게임과 캣니스에 대해 생각한다. 


구역 숫자대로, 헝거게임의 멘토는 12명의 젊다 못해 어린 캐피톨 엘리트 출신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12명의 아이들에게 헝거게임은 일종의 졸업 논문과 같은 프로젝트로, 그 나잇대에 걸맞는 절박한 인정 욕구를 가지고 이 게임에 매달리고 있다. 스노우는 개중에서도 조금 더 절박한 처지였는데, 스노우 가문은 유서깊은 엘리트 가문이긴 하나 경제적으로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스노우는 다른 멘토 아이들 보다 더 멘토로서의 역할에 몰입하고, 조공인들에 대해 더 강렬한 감정을 느낀다. 스노우는 가끔 조공인들의 처지와 자신의 처지를 명확하게 구분해낼 수가 없다. 조공인들이 굶주릴 때 자신 또한 굶주리고 있으며, 조공인의 성공 여부는 곧 스노우 그에게 그 자신보다 중요한 스노우 가문의 존폐 여부와 직결되므로. 


처음 이 소설에 대한 소식을 접했을 때, 과거 헝거게임 시리즈를 읽으면서 스노우라는 캐릭터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대체 왜 이 캐릭터에 대한 스핀오프가 나오는 걸까...? 의아해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어쩌면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캐피톨이라는 공백을 채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헝거게임 시리즈 내내, 캐피톨은 독자들에게 헝거게임이라는 비현실적이고 말도 안되는 십대들의 살인 게임에 열광하는 미친놈들이 사는 이상한 동네일 뿐이다. 캐피톨이 바로 그 독자들이 사는 세상에 대한 거울판이고 리얼리티를 획득해야 하는 소재임에도 작가는 캐피톨에 대한 묘사에 성의가 부족했다. 


그리고 <노래하는 새와 뱀이 발라드>를 읽다보니 점점 기억이 났다. 애초에 작가는 헝거게임 시리즈의 악당, 스노우에게 안배해둔 것이 꽤 많았던 것 같다. 읽다 보니 원래 헝거게임 시리즈에서도 스노우의 찌질함과 이상한 취향에 대한 설정이 과하게 많았었던 게 생각났다. 웨딩피치 악당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웨딩피치 악당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유명한 짤이 있지 않은가.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 짤에서 초록색 아이섀도우를 한 빌런캐릭터. 그게 정확히 어떤 맥락에서 나온 장면인지는 모르겠지만 스노우도 딱 그런 일침에 듣기에 어울리는 캐릭터였다. 남의 로맨스를 꼴 보기 싫어하고 질투하는 이상한 인물. 스노우가 자꾸 예전에 자기가 멘토로서 담당했던 조공인과 로맨틱한 무드가 있었다고 티 내는 것도 우습다고 생각했었던 같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스노우에 대해서 안다. 그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혹은 이미 그런 사람이었다. 이 두 가지 서술이 모두 어울리는 사람이다. 스노우는 자기 말대로 그녀와 떠나기 위해-혹은 세자누스를 죽인 그 순간에- 스스로를 죽였나? 아니면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나. 아무도 대답할 수 없고 사실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겠지. 어쩌면 상대적으로 스노우가 인간적으로 보이던 아카데미 시절도, 그게 인간적이었던 것 맞나? 그냥 스노우는 자기 안위가 가장 중요했고, 그들 중에서 그나마 스노우가 가장 조공인들과 가까운 처지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어쨌든 결국 그가 되어버린 괴물 같은 존재는 적어도 그때는 아니긴 했다. 그때 스노우가 일등을 하지 않았으면 어땠으려나? 골 박사의 실험은 헝거게임이 아닌 스노우로 완성되었다. 


스노우가 루시 그레이에게 품는 마음은 로맨스의 맨얼굴 그 자체다. 남자가 여자에게 열등감을 품으면 그것은 쉽게 로맨틱한 감정으로 둔갑한다. 처지가 안 좋은 여자를 자신의 라이벌로 생각하는 것보다, 그 여자를 사랑해 버리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로맨스 특유의 역할극과 같은 남녀 구도는 이걸 매우 쉽게 흡수한다. 분노, 열등감, 지위의 격차. 이 모든 것이 로맨스라는 물에 잘 녹아드는 수용성 물질과 같다. 로맨스를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가장 핵심적인 정서가 뭔가. 남자주인공의 질투다. 스노우는 루시의 능력에 대한 질투를 루시가 그리워하는 남자에 대한 질투로 순식간에 위장했다. 


이 책이 로맨스를 해체하는 방식은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와 비슷한 듯 다르다. 나를 찾아줘 와 이 소설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 둘 다 남자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여자주인공은 이해할 수 없는 객체에서 시작해서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독자와 가까운 위치를 점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결말에서 여자 캐릭터 쪽이 가지고 있던 초반의 의뭉스러움이 완전히 풀리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로맨스가 기본적으로 여성독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장르임에도, 그것에 어떻게 남자들이 기생하고 또 로맨스 문법을 이용해 여자들을 기만하는지 보여주기도 한다. 원래의 헝거게임 시리즈는 대놓고 캣니스와 피타를 미디어 속 커플이라고 선언하고, 극적으로 보여지는 미디어 속 (장르) 로맨스의 도식과 실제로 사랑과 신뢰가 작동하는 방식을 대비시켜서 전자의 공허함이 두드러진다. 반면 나를 찾아줘는 대놓고 여자주인공이 무슨 로맨스라는 여성향 장르 그 자체가 저벅저벅 걸어 나와 육신을 입고 세상을 헤집는 괴물이 된듯한 인상이다. 이 세상은 왜 로맨스 소설 같지 않은 거야? 현실 남자들은 왜 우리 xx(대충 당신이 좋아하는 로맨스소설, 혹은 k드라마의 남자주인공 이름을 넣어라) 같지 않은 거야?!라고 사실 많이들 외치지만 그렇게 외치는 대부분의 여자들이 가상의 남주들보다 못난 현실의 남자들을 그럭저럭 참고 산다. 하지만 나를 찾아줘의 여자주인공은 타협하지 않았다. 얼굴만 그럴듯하지 전혀 드라마 남주 같지 않았던 자신의 남편을 그 벌로서 엄청난 누명을 씌우고 죽이기로 결심한다. 어떻게 보면 헝거게임 보다 좀 더 유머러스하고, 장르 로맨스를 더 경멸한다. 어쩌면 그걸 향유하는 여자들까지도. 


하지만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와 비교해서 나를 찾아줘의 멋진 점은 중간에 좀 흐름이 깨진다 싶어도 갑자기 그 괴물 같은 여자주인공이 뻔뻔하게 이야기 전면에 주인공으로 나서버린다는 점이다. 그렇게 닉이 없는 곳에서 그녀가 뭘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풀어나가면서 주인공의 지위를 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에서는 스노우의 시야에 닿지 않는 루시에 대해서는 독자가 전혀 알 수가 없다. 아마 의도적으로 삭제된 듯하다. 우리는 스노우와 마찬가지로 루시에 대해 전부는 알 수 없다. 카메라가 닿지 않는 헝거게임 무대 뒤편 어두운 미로 속에서 루시와 제섭이 어떻게 지냈는지, 아니면 헝거게임이 시작하기 전에 우리 같은 곳에 갇혀 지내던 루시는 다른 조공인들과 무슨 일이 있었을지와 같은 것들. 


어쩌면 우리가 캐피톨인이기 때문일까? 우리는 스노우에 대해서는 알 수 있지만 루시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우리의 관음증적 시선에 샅샅이 노출되는 영혼은 스노우뿐이다. 스노우처럼 빈약하고 자기중심적이고, 또 부푼 자존심에 잠깐 상처를 입었을 뿐인 영혼. 자기가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고 믿는 오만하고 어리석은 영혼. 우리가 관음 할 수 있고 이입하도록 허락된 존재는 이런 스노우다. 


원래 헝거게임 시리즈가 미디어에 노출되는 캣니스와 실제 캣니스를 모두 남김없이 보여주고, 캐피톨 사람들이 캣니스를 착취하는 동시에 어떻게 연민하고 사랑하게 되는지 보여준 것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인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아쉽다. 이렇게나 잘된, 특히 영어로 쓰이고 대형 프랜차이즈 영화로 각색되는 소설은 보통 아주 멀리 닿는다. 먼 훗날 캐피톨의 땅이 되리라 예언된 그 나라의 언어로 쓰인 소설들이 가장 먼 구역까지 닿는다. 그리고 분명 스노우보다 루시에 더 가까운 독자들이 있다. 야망있고, 언제나 자유를 꿈꾸고, 신뢰하는 남자들에게 배신당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어둠 속의 루시가 무엇을 하고 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그리고 루시의 목소리를 잠깐이라도 직접 듣기를 고대했을 것이다(너무 끝까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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