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이지적인 사색
01. 이 소설은 액자소설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야기의 흐름은 비교적 간단하다. 고전어를 가르치던 한 남자 ‘그레고리우스’가 갑자기 어떠한 책에 이끌려 그 책을 쓴 저자 ‘프라두’의 삶을 따라가는 이야기이다. 책은 주로 프라두의 삶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레고리우스가 발견한 프라두의 책은 그의 생각들을 모아놓은 자전적 에세이이다. 프라두는 책에서 그는 계속해서 자문하고 사유한다. 신의란 무엇인가. 외로움의 원인은 어디서 오는가. 말과 언어는 무엇인가. 특히 이 소설에서 ‘언어’와 ‘말’이 굉장한 중요한 요소가 되는데 이에 관한 그의 생각이 정말 인상적이다.
다른 사람에게 뭔가 말을 할 때, 이 말이 효과가 있기를 어떻게 바랄 수 있을까? 우리를 스치고 흘러가는 생각과 상과 느낌의 강물은 너무나 강력하다. 이 강물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이 우연히, 정말 우연하게도 우리 자신의 말과 일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말을 쓸어내고 지워버린다.
자기 목소리를 바깥에서 듣고 싶지 않다. 한 말을 박제하다니. 사람들은 보통 자기의 말이 잊혀지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유롭게 말한다고. -녹음기를 사용하며 프라두가 적은 글
우리는 말을 통해 자기를 드러낼 뿐 아니라 스스로를 배신하기도 한다. 표현하려던 것보다 훨씬 더 심하게 속내를 드러내어 원래 의도했던 바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02. 프라두의 책은 사유의 끝을 보여준다. ‘사유’ 한다는 것의 정의를 직접 보여주고 있는 느낌이다. 그의 사유는 대부분 어둡다. 어두우면서도 아름답고 섬세하면서도 날카롭다. 처음에는 장황하다고 생각했는데, 읽을수록 빠져든다. 철학적이지만 한번 쯤 다들 생각해봤을법한 것들을 묻는데 시각이 굉장히 색다르다. 너무나 깊은 곳에서 시작된 생각은 살면서 억누르고 살았던 것들, 내제되어 있지만 너무 깊숙한 곳에 있어서 건드려볼 수 없었던 것들을 이야기한다. 그것을 밖으로 꺼내서 표현하는데, 그 감정은 굉장히 격렬하고 폭발적이다. 처절하고 안타깝기까지 하다.
이런 생각을 이렇게까지 깊게 할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하는 ‘생각’이라는 건 당연하게 내뱉을 수 있는 무의식에 불과했던 것 같다.
03. 이 소설은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프라두의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어린 시절부터 죽기 직전까지의 삶을 볼 수가 있다. 그가 어린 시절 느꼈던 갈등, 그의 수많은 선택들을 보며 ‘과연 나라면’이라는 질문을 수차례 해 보았다. 그의 생각하는 방식이 너무 독특해서 많은 부분 공감을 할 순 없었지만, 충분히 이해가되기도 했다.
성장소설로만 본다면 재미없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 어릴 때부터 똑똑했던 아들, 엄격한 아버지와의 갈등, 사랑을 놓고 벌어지는 갈등, 사랑을 놓쳐버린 아픔. 뭐 이런 흔해빠진 소재들이라 사실 마지막에 가선 좀 맥빠진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행히도 그런 평범한 소재들이 평범하지 않은 생각을 만나면서 진부함을 비껴갔다.
04. 인문학이라는 건 인간의 가치탐구와 표현활동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다양한 사유할 것을 제공해주는 역할.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그 어떤 책보다도 인문학적이다.
책의 뒤편엔 “너무나 이지적인 사색”이라고 써져있다. 이보다 더 이 책을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일상의 사소한 생각들을 더 깊게 파헤쳐보고, 빠져들게 만드는 작가의 내공이 어마어마해 보인다. 오랜만에 정말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
+영화화 된 소설이기도 하다. 몇몇 티저들을 보니 리스본의 모습이 너무나 궁금해진다. 꼭 영화를 한번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