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아쉽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퇴사를 했다. 만 3년 하고도 8개월을 다닌 회사였다. 첫 번째 사회생활을 고스란히 겪었던 곳을 뒤로하고 나는 백수가 됐다.
퇴사의 명확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회사 생활의 문제도 아니었고, 일이 힘든 것도 아니었다. 설명하기 쉽지 않은 이런저런 상황들이 겹쳤고, 어느 순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회사에 처음 들어올 때와 비슷했다. 전공과 전혀 다른 직무였음에도, 이 회사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이곳에 왔고, 이제는 떠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퇴사를 결심했다.
퇴사를 결심하고 회사에 말한 이후, 졸업을 기다리고 있는 학생의 기분이 들었다. 뭔가 시원하고 홀가분한 기분이랄까. 책 한 권의 마지막을 덮는 기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총 4번의 졸업식을 겪었지만 아쉬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딱히 행복하지도, 그렇다고 슬프지도 않았다. 그냥, 제법 무덤덤했다. 졸업이구나. 다음 스테이지를 향한 리셋. 감정의 티끌 하나 남기지 않는 깔끔한 마무리였다.
퇴사도 그럴 줄 알았다. 아니, 오히려 졸업보다 훨씬 기분 좋을 줄 알았다. 퇴사하면 무얼 할지 고민할 때마다 홀가분함을 넘어선 행복감이 피어오르곤 했다. 여행을 갈까? 어디로 가지? 역시 외국으로 가야겠지. 면허도 따야겠다. 평일 낮에 미술관도 갈 수 있겠어. 햇볕 좋은 날 돗자리 깔고 한강에 누워 있어야지. 이런 생각을 하며 퇴사 날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막상 퇴사를 마주하자 마냥 홀가분하고 행복하지만은 않더라.
동료들에게 퇴사 소식을 전할 때마다 가장 많이 물었던 건, 퇴사의 이유와 다음 행선지였다. 그냥, 그만둘 때인 것 같아요. 다음에 갈 데는 정해두진 않았고, 일단 좀 쉬려고요. 이렇게 답하면 대부분은 내 퇴사를 축하하고, 또 아쉬워했다. 안 돼, 가지 마. 어딜 가요. 아 진짜 아쉽다. 왜 그만둬요. 아, 일단은 축하해요. 민진 님은 어딜 가나 잘할 거예요. 혹시나 좋은 자리 있으면 연락 줄게요. ㅇㅇ, ㅇㅇ에 관심 있으면 연락해요.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퇴사 날이 다가올수록 홀가분함과 함께 아쉬움도 커져만 갔다. 좋은 사람들과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하지만 구태여 아쉬움을 내색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내색을 하면 내가 더 힘들어질 것 같았거든. 모든 결정엔 아쉬움은 있을 수 있지만 미련이 없어야 하는데, 자꾸 아쉬움을 곱씹다 보면 미련으로 번질 것 같았다. 좋은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아쉬움이 짙었고, 그래서 미련으로 번질까 두려웠다.
마지막 날이 되니 졸업과는 전혀 다른 기분이 들었다. 책 한 권의 마무리라기보다, 한 챕터의 마무리를 한 기분이 들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날 배웅해주는 사람들을 보니 졸업보다 훨씬 아쉬웠고, 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내가 보낸 3년 8개월이라는 시간이 헛되지는 않았구나. 나 그래도 회사 열심히, 잘 다녔구나. 나 꽤 복 받은 사람이구나. 내 선택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또 아쉬워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나의 첫 퇴사는 완벽하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