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떡 건축에 관하여
이 책은 상가아파트에 관한 책이다. '무지개떡 건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상가 아파트를 설명한다. 여러 가지 사례들을 한데 모아 묶어놓은 책이며 상가아파트의 어떤 점이 중요하며, 도시 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말해준다.
1. 기록이라도 남아서 좋겠다.
지금 이 책에 소개된 오래된 상가아파트들은 어쨌거나 역사에 자신의 기록을 남겼다. 예전에 그 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언제건 책을 펴서 사진을 보고 회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2년전, 아니다 3년전인가 벌써 헷갈리게 되었지만, 할머니 집이 재건축으로 허물어졌다. 우리 집에서 걸어서 15분거리에 위치하고 나 또한 이 동네에서 20년을 살았다. 여느때와 같이 휴가가는 마음으로 본가에 내려갔는데 할머니 동네가 통째로 사라져있었다. 사실 조금 충격적이었다. 어릴 때 내가 놀던 앞집 마당, 인사하던 옆집 할머니, 무엇을 파는지 궁금한 구멍가게,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는 골목길, 가파른 계단 등 모든것이 사라져있었다.
이제 남은 건 사람들 머릿속의 기억밖에 없었다. 변변치 않은 동네라 누가 와서 예쁘게 사진을 찍은 것도 아니었고 대단한 건축물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 말그대로 좁은 땅에 집을 얹고 다닥다닥 붙어사는 단층짜리 집들이었다. 한창 공사가 진행중인 그 곳을 보며 여기에 누가 살았던것이긴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서울의 오래된 상가아파트들은 어떻게든 기록을 남겼으니 후에 허물어진다 한들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의 상실감과 허무함을 조금은 달래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2. 도면을 달라
책의 전체적인 주제가 상가아파트를 소개하는것이고 저자역시 건축가이므로 글이 상당히 건축적이다.
'모서리 쪽에 2,3층을 관통하는 복층 세대가 있고, 여러 개의 발코니가 이웃 건물이 인접한 동쪽을 제외한 세 방향에서 집요하게 건물의 내부를 파고 들어온다. 단 하나도 같은 평면이 없다.'
이쯤 읽고나니 도면 없나? 하고 앞뒤를 뒤적였다. (없었다.) 또 '가로로 긴 대지... 복도를 중심으로... 평면...'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또 도면이 없나 뒤적인다. (물론 없다.) 나의 전공때문인지 몰라도 건축적인 글을 읽을때면 도면을 보고싶다. 글을 읽기 전에 도면을 보면 글을 이해하기 훨씬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책의 분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인쇄비도 상당해질 것이기 때문에 다들 어느정도 선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면을 볼 수 없다는 것은 굉장히 아쉬운 일이다.
+ 후에 전자책 리더기가 아주 발달하거나 (아니면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다면) 이미지가 주(主)가되는 책을 읽기 아주 좋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각주를 터치하면 도면들이 주루룩 뜨고 링크된 지도를 클릭하면 주위 로드뷰를 볼 수 있는.. 언젠간 이렇게 책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길 바란다.
3. 공감의 한계
서울 이외의 사례들은 조금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상가아파트'에 대한 책이기 때문에 단순히 건축의 디자인이나 평면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주변 환경을 이해해야 어떻게 상가+아파트라는 건축물을 이해하기 쉽다. 나 같은 경우는 로드맵을 켜고 주변 환경을 둘러보는 방식으로 책을 읽었다. 나는 다행히 서울에 살기 때문에 책의 반 정도는 이해가 가능했지만 서울 이외의 도시들은 잘 와닿지 않았다. 저 먼 제주도에 사는 사람이 이 책을 본다면 과연 이 책이 재미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대구의 테라스 상가아파트의 경우 재건축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아프긴 했는데, 할머니집이 재건축 된다는 이야기를 들을때와 감정의 농도가 확연히 달랐다. 건축을 활자로 읽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이것이 곧 건축의 가장 큰 힘이기도 하다. 건축이라는 것은 단지 건물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살아오는 삶 전체가 담겨있다. 그렇기에 내가 가보지 못했던 지역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가 그렇듯이 건축 또한 해오던 방식을 세련되게 반복하는것만으로는 절대 근본적인 성취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어디 다른 나라에서 선례를 수입하여 우리의 미래를 해결하려는 습관 또한 효용의 한계에 다다랐다.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집요하게 관찰하고 분석하여 이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따라서 그만큼 외로울 수 있는 결정을 내릴 줄 알아야한다.
이 책은 도심 속 건물들을 자세히 바라볼 수 있게 만들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혹은 낯선 동네를 지나치면서 여기도 오래된 상가아파트가 있나? 하고 찾아보게 되었다. 실제로 신설동 주변의 청계천을 건너다가, 숭인상가아파트를 보게 되었다. 오, 저 건물 왠지 '가장 도시적인 삶' 책에 나올 것 같이 생겼는데? 하고 집에가서 책을 확인해보니 실제로 책에 수록되어 있는 아파트였다.
어떤 건물은 책 한 페이지에 이름을 남길테고, 어떤 건물은 또 소리없이 사라져 갈테다. 소리 없이 사라져 갈 건축물들을 위해 앞으로 내가 살던 동네, 내가 살던 도시를 좀 더 자세히 바라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