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의 역할이 무엇이고, 어떤 번역이 좋은것인가
책 이야기에 덧붙여 다른 이야기를 좀 해볼까한다.
나는 외국작품을 고를 때, 작가만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출판사이다. 뭘 그리 재고 따지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책에 대한 깊이가 얕아서 그런 것이다. 좋은 출판사가 좋은 번역을 내 놓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어떻게 보면 편견과 선입견, 을 가지고 이른바 ‘네임드’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고르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 이방인을 읽고 생각이 좀 바뀌었다.
여러 리뷰와 서평들을 찾아보고 알게 된 사실인데, 이 책을 가지고 한차례 번역논쟁이 있었다. 내가 처음 읽은 책은 이방인(새움출판사, 이정서 옮김 – 이하 이정서) 이었고, 나중에 읽은 책이 이방인 (민음사, 김화영 옮김 – 이하 김화영)이다. 이정서가 옮긴 이방인은, 김화영 의 번역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출판한 책이다.
개인적으로 이정서의 책이 좀 더 잘 읽히긴 한다. 언어가 모두 현대식으로 번역되어 있어서 이해가 좀 더 잘된다. 그에 반해 김화영의 책은 단어나 말의 쓰임이 오래된 것들이 많아 옛날 책을 읽는 기분이 든다. 중간 중간 문장 구조가 어색한 것도 있었는데, 원문에 충실한 번역인건지 오역인건지 잘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이정서 번역에 수긍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전에 나온 번역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간간히 ‘비난’ 하는듯한 자세와 꼬투리 잡기식의 비판 때문이다. 새움 출판사의 태도도 한 몫 했다. 책 앞에다 떡하니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고 박아두었다. 김화영 번역가는 우리나라에서도 인정받는 번역가이자 권위자이며,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도 지금까지 널리 사랑받는 소설이다. 그런 책에 대놓고 반기를 든 셈이니, 그것도 (어떤 시각으로는) 굉장히 젠틀하지 않은 태도로 반기를 들었으니 안 좋게 보는 시선들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들의 논쟁을 보며 의문이 생겼다. 좋은 번역이란 대체 무엇인가?
문득 나츠메 소세키의 일화가 떠올랐다. 그가 영어 교사였던 시절 학생이 I Love you라는 본문을 직역하자 그 문장을 "달이 예쁘네요"라고 번역을 해주었다는 일화이다. 주옥같은 표현으로 길이길이 남아있는 사랑표현이지만 번역가의 입장이라면 이게 과연 옳은 자세였는가 궁금해진다.
‘번역’의 역할이자, 문제점이자, 한계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한국 문학을 제외한 모든 언어의 문학은 작가->번역가->독자라는 시스템을 거친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 ‘번역가’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번역가는 어떤 요소를 가장 우선으로 두어야 하는걸까. 특히 우리에게 생소한 언어들을 번역할 때 생기는 문제점을 독자는 어떻게 간파해야할까?
작가는 저마다의 문체를 가지고 있다. 말과 글은 사람의 세계관과 철학을 드러낸다. 글을 읽다보면 필체나 표현력 등에서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이 상상이 가능하다. 물론 글의 성격과 실제 성격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는 비슷한 부분을 가지며 작가의 어조에 따라 글의 분위기가 좌우된다. 그렇다면 번역가는 작가의 문체를 최대한 살리는 게 가장 옳은 번역의 길일까?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문장의 구조가 비슷하다면 그나마 가능할 수 있겠지만, 영어를 포함한 서양어들(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은 문장 구조 자체가 한국어와 상반되기 때문에 문체를 전달하기에 한계가 있다. 간혹 영미권 책을 읽다보면 ‘아 이거 ~~한 문장을 번역했구나.’ 하는 어색한 느낌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색한 문장이 없도록 독자에게 전달만 잘 하면 되는 걸까?
이것도 정답이 아닌 것 같다. 나는 두 가지 번역본의 이방인을 읽었는데, 내가 느낀 알베르 까뮈는 미묘하게 달랐다. 그렇다면 나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은것이 맞는걸까?
번역가로서 그들의 역할은 막중하다. 평범한 한국인들 중 유럽문학을 곧바로 읽을 만큼의 언어실력을 가진 사람은 얼마 안 될 것이다. 오역이 있다한들 사람들은 판단조차 할 수 없으므로 전적으로 번역가를 믿고 책을 읽는다.
하지만 크게 본다면 대중보다 글을 먼저 읽게 될 뿐, 번역가도 독자이다. 작가가 창작해낸 작품을 독자가 읽을때엔 그저 활자를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 스스로 작품에 대해 생각하며 그 작품을 재탄생시킨다. 어찌보면 독자로서 그의 가치관이 반영되는 건 당연한 소리일지 모른다.
이번 책을 읽으며 그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어떤 번역이 좋은것인지 수없이 자문했지만 쉽게 답을 내리기 힘들었다. 특히나 내가 읽은 ‘이방인’같은 단편소설들엔 더 많은 세심함이 요구된다. 장편이 20/100 이라면 단편은 2/10이다. 똑같은 비율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장편소설에서 훨씬 더 많이 작가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 끼어든 ‘번역가’의 존재. 그들은 한 명의 독자로서, 그리고 한 명의 번역가로서, 문체의 전달, 정확한 표현, 독자의 이해 등의 여러 가지 가치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 이 글은 '번역'에 대한 나의 생각을 쓴 것이지 이방인의 '번역 논쟁'을 소개하고자 올린 글이 아님을 밝힌다. 논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알고싶다면 직접 찾아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