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 도시의 익명성을 사랑하며 지내왔는데 고양이들의 세계에 입문한 후에는 어쩌다 보니 동네 어른들과 전화도 하고 카톡도 하는 사이가 됐다. 처음에는 소통하는 게 부담스러워서 캣맘 선배님의 전화를 최대한 피하려고 해 봤지만 그렇게 해서는 고양이들을 돌볼 수 없다는 걸 금세 알게 되었다. 이제 연락은 내 쪽에서도 만만치 않게 한다. 요즘 토리는 어디서 지내는지, 급식소 위치를 바꿔보는 게 어떤지, 누구누구 약을 먹여야 하지 않을지 등 중요한 일들을 함께 상의하지 않고서는 할 수가 없었다. 위층에 사시는 기부 천사님은 매번 고양이 간식을 박스째 사다주시고, 그릇이며 급식소며 필요한 물품도 협찬해 주신다. 가끔 사진을 주고받으며 여기 있던 밥그릇이 없어졌고, 어디선가 새끼 고양이가 나타났다며 각종 상황을 공유한다.
어느 날 비쩍 마른 몸으로 아파트에 나타난 노랑이를 보고 기부 천사님의 “쟤 병원에 데려가서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는 말에 우리는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포획 담당, 이동 담당, 보살핌 담당으로 각자 역할을 자연스레 수행해 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와서 나는 약을 먹였고, 캣맘 선배님은 밥과 잠자리를 보살펴 주셨고, 기부천사님은 각종 캔을 지원해 주셨다. 이후에 다른 고양이가 아플 때도 한 명이 약을 타 오면 다른 누군가가 약을 먹이는 식으로 우리는 고민 없이 당연하게 서로를 도왔다. 혼자서 생각으로만 끝나던 일은 여러 명의 손에 가닿자 추진력을 달고 저절로 앞으로 나아갔다. 함께 이야기만 나눴을 뿐인데 어느 순간 고양이들의 치료가 끝나고, 수술이 끝났다. 걱정을 나눔으로써 우리는 든든함을 느꼈다.
그중에서도 서로의 힘이 가장 필요할 때는 적에 대항할 때였다. 교묘하게 고양이들을 못살게 굴던 한 사람과 질긴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나는 증거를 잡아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캣맘 선배님은 그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해 보자고 했다. 역시나 도시의 익명성을 사랑하는 나는 도무지 그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하는 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결론을 말하자면, 우리는 지난 3년 동안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다. 대화를 시도해보기도 했고, 깨진 사료 그릇 때문에 경찰에 신고도 해 봤지만 증거가 부족해 사건은 종결되었다. 길고양이 밥그릇 훼손은 명백한 범죄다. 최근 기사에 따르면 길고양이 밥그릇 훼손으로 재물손괴 등의 혐의를 인정받아 벌금형을 선고받은 사례가 있고, 캣맘에게 욕설을 했다가 모욕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례도 있다. 구청과 동물보호단체에서 나서 주기도 했지만 그것도 효과는 잠시 뿐이었다. 결국 마지막엔 아파트 관리소장님의 중재 아래 캣맘 선배님의 주도로 (임시겠지만) 합의점을 찾은 상태다.
내 권리를 주장하는 일보다 약자를 대신해 나서는 건 더 어려웠다. 자칫하면 사람들 간의 갈등이 고양이에게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기에 늘 조심스러웠다. 혼자였다면 나는 그 긴 싸움을 견디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매번 지친 기색도 없이 새로운 방법을 찾자는 쪽은 선배 캣맘님이었다. 다른 건 못 해줘도 얘네 밥자리는 지켜줘야 하지 않겠냐며. 반면 나는 오로지 법적으로 그 사람을 제대로 응징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게 합리적이고 확실하게 이기는 거라고 자신했지만 결국 선배 캣맘님의 끈질긴 설득과 관용이 이 갈등을 해결한 셈이다.
놀랍게도 선배님은 사람에 대한 포용도 잃지 않았다. 같은 동네 살면서 모질게 할 순 없다며 계속 대화를 시도하는 건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동물을 지키자니 여러 흉흉한 사건들로 인해 사람이 자꾸만 미워졌다.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면서도 적을 미워하지 않는 태도는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걸까. 그게 가능한 사람의 부지런한 손길은 아파트를 중심으로 저 멀리 뻗어있는 골목까지 닿아있었다. 캣맘 선배님은 "내 눈에 고양이들이 안 보여야 되는데" 하면서도 온 골목을 누빈다. 선배님의 가느다란 몸에서 뿜어내는 사랑은 오랜 시간 수많은 생명을 살려왔다. 미움은 쉽고 사랑은 어렵다.
크고 작은 갈등이 생길 때마다 여전히 캣맘 선배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 같이 방법을 생각해보자고 한다. 내 손 안에서는 심각하던 고민거리가 어른들에게 넘겨지면 금세 작아지고 만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에게는 두려움도 없는 것처럼 보이고, 무엇도 그를 지치게 할 것 같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