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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놀 Sep 23. 2021

그녀

손바닥소설-테라피/ '아빠가결혼 할때'

       


아빠가 달라졌다.

일찍 일어난다. 매일 옷을 갈아입는다. 콧노래를 한다. 웃을 타이밍이 아닌 데 히죽, 웃는다.

출근할 때 안 하던 짓을 한다. 이를테면 나를 껴안고 쭉쭉 소리가 나게 볼 딱지에 뽀뽀를 한다거나 머리를 세게 쓰다듬고, 어울리지 않게 “사랑해, 아들!”이라고 말하고 간다. 분명 뭔가 있다. 오늘 아침에도 유난스럽게 출근한 아빠. 아빠가 현관문을 닫자마자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뭔가 있’었다.

예쁘게 포장된 선물상자, 혹시 블루투스 이어폰?

크기로 보면 딱 이어폰인데, 포장지가 좀 애매하다.

화려하다. 리본도 달렸고. 이건 아들에게 주는 선물일 리 없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귀에 대고 소리를 들어보고 손에 들고 무게도 느껴 본 결과, 이것은 분명 나의 선물은 아니라는 결론이다. 아빠에게 여자 친구가 생긴 게 틀림없다.

이런 선물을 준비해놓고, 응큼하게 매일 일찍 일어나 운동하고 옷 갈아 입고, 콧노래를 하다니. 배신자 아빠.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 선물이 블루투스 이어폰이 아니란 점은 몹시 섭섭하지만 솔로인 아빠가 여자 친구를 만나는 것을 대놓고 반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도 여자 친구가 있고, 아빠도 여자 친구가 필요할 테니. 그쯤은 인정한다. 그런데 추리대로 선물상자 안에 있는 게 반지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빠가 결혼하거나 할 수도 있는 일이니까.

아빠의 결혼이 문제가 될 건 없다. 하지만 내게 새엄마가 생기는 것은 문제가 다르다.

일단 느낌이 싫다. 아빠의 애인과 함께 사는 그 분위기가.

애매하다.

예의를 차리고 밥을 먹어야 할 테고 텔레비전을 보고, 잠을 자야 한다. 소파에 누워 빈둥거리며 리모컨을 돌리거나 게임을 하거나, 발가락으로 과자봉지를 들어 올려 먹을 수도 없다. 침대도 매일 정리해야 할 테고. 책상 정리도….

방에서 지내야 할 시간이 많아질 텐데. 내 방은 좀 좁다. 집에 와도 학교에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벌써부터 피곤해진다.

아빠의 결혼을 막을 수 없을까?

아마도.

어른들의 결정을 아이가 바꾸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지질하게 울며불며 결혼하지 말라고 매달리고 싶지도 않다. 난 작년에 벌써 십 대가 되었으니 더 이상 애가 아니다.

다만 궁금하다. 아빠의 그녀가.

떠올려보자. 아빠와 함께 일하는 채영 아줌마? 나랑 같이 스파게티 먹은 적 있다. 아니, 아니. 채영 아줌마는 남편이 있다. 아이가 없을 뿐.

소희 아줌마? 아빠는 빼빼 마르고 단발머리에 눈 쌍꺼풀이 없는 얼굴을 좋아하는데…. 어른들 말로는 꼭 이상형과 결혼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으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혹시 지혜 누나? 지혜 누나라면 빼빼 마르고, 단발머리, 쌍꺼풀도 없다. 하지만, 그냥 누나다. 아빠의 애인이 되기엔 너무 어리다. 

그럼 누구지?

어렵다.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고 아빠에게 우리 둘이 살자고 말할까. 

그건 좀 내가 비겁해 보여서 싫다.

아, 모르겠다.

그때, 아빠가 헐레벌떡 다시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가 뭔가 챙기고, 다시 나오더니 느끼하게 윙크를 하며 다시 나갔다.

쏜살같이 방으로 가서 서랍을 열었다.

없었다. 리본 달린 선물상자. 이젠 확실해졌다. 아빠는 아마 오늘 프러포즈를 할 건가 보다.

무릎 꿇고, 풍선 날리며 촛불 사이로 가서 나와 결혼해줄래? 라며 반지를 꺼낼 건가 보다. 

아들이 하나 있지만 괜찮다고. 자기 할 일은 다 알아서 하는 성숙한 초딩이라고 말하며.

온종일 아빠 문제로 골치가 아파 게임도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었다.

이상하다. 아빠가 벌써 왔다.

“아빠랑 어디 좀 가자. 옷 갈아입고 와.”

들떠 보인다. 성공한 걸까. 나를 여자 친구에게 소개하려는 걸까.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고 나왔다.

너무 뻔한 예감 이어선지 놀랍지도 않다.

멀리서 본모습은 태권도 학원 사범님 같은 모습이다. 보통 체격에 보통 키, 짧은 머리,  반짝이는 초코볼 만한 귀고리. 청바지에 흰 셔츠. 아빠의 이상형은 아니지만 첫인상이 나쁘진 않았다. 일단은 그녀의 마음에 들어보기로 했다. 

앞으로의 평화로운 일상을 위해.

꾸벅 인사를 했고, 차에 올랐다.

우리는 지금 함께 살 집을 보러 간단다. 이렇게 기습적으로 훅 들어올 줄은 몰랐다. 아빠의 계략은 아닌 것 같고. 결단력이 있어 보이는 그녀의 계략인 듯했다. 6개월 후면 네 동생이 태어날 거라며. 바보처럼 웃고 있는 아빠와 룸미러로 내 표정을 살피는 아빠의 여자 친구 사이에서 나는 적당히 멋있는 표정을 찾고 있었다. 

아, 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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