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스타벅스, 투섬, 이디아, 백다방, 메가커피, 탐앤탐스, 잠시잠깐, 화양연화, 책앤카페, 풀바셋,
집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카페들이다. 모두 한 번은 가봤고, 새로 생기면 일부러라도 찾아가 보고, 그날의 목적에 따라 선택하기도 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결국은 돌아가는 단골 카페도 있다.
사람들은 왜 카페에 갈까?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녹차도 마시고, 케이크도 먹고, 책도 보고, 공부도 하고 일도 한다.
카페엔 음악이 있고, 엉덩이 편한 의자가 있고, 조명이 있고, 적당한 소음도 있고, 친구도 있고, 혼자일 때도…. 해서, 커피는 맛있고, 케이크도 맛있고, 공부도 잘 되고, 책도 잘 읽히고, 대화도 잘 되고, 찾아갈 때마다 즐거운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카페에 간다. 버리기 아쉬운 습관처럼.
카페가 등장한 건 17세기라고 한다. '혀의 감각을 일깨우고 두뇌를 날카롭게 해 주는' 검은 음료 커피를 왜 집 밖에서 마시게 되었을까. 그 당시 '커피 마시는 집'들이 생겨나면서 호화로운 실내장식으로 유명해졌다. 그곳이 토론의 장이 되고(그래서 권력자들에겐 감시의 대상이었지만) 위대한 예술이 싹트는 장소이기도 했다.
고흐와 고갱, 피카소, 마네와 르느와르, 보들레르와 랭보, 사르트르 등의 많은 예술가들이 카페를 사랑했다.
우리나라의 예술가들도 다르지 않아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기에도 제비다방에 모여들었고, 그러다 전쟁을 겪고, 가난했던 시절에도 시골까지 다방이 있어서 커피를 배달시켰다는데... 다방은 점점 진화해 팝송을 함께 듣고, 곡 소개도 해주고, 신청곡도 받는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변모했다. 그 시절 장발의 디제이들이 새로운 다방문화를 이끌었다. 그때까진 커피에 프림, 설탕이 기본 세트였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아메리카노’라는 커피가 등장해, 숭늉처럼 커피를 마시게 되었고, 프림과 설탕은 사라지고, 시럽과 우유를 넣은 라떼를 즐겨 마시기 시작했다. 그 무렵 초록의 원 안에 그리스 신화 속 등장하는 세이렌이 그려진 생소하지만 모던한 스타벅스가 등장했다. 사람들은 아침에는 카페에서 카페인을 충전하고 점심에 식후 잡담을 즐기고, 혹은 책을 들고 노트북을 들고, 때론 기저귀 가방을 들고, 동창 모임 후에, 가족 모임 후에도, 카페를 찾는다. 코로나 19가 아니었다면 더 다양한 카페들이 생겼을 거다. 기타를 배우는 카페, 가구를 만드는 카페, 꽃을 만드는 카페, 영화를 보는 카페, 애견카페들에 이어서 말이다. 코로나 19의 여파로 홈카페가 유행이었다고 하니 카페 사랑은 끝이 없다.
사람들이 이토록 카페를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내가 카페를 사랑하는 이유와 비슷하지 않을까. 내가 카페를 사랑하는 이유는 한정되고 익숙하고 관습적인 공간의 지루함 때문이다. 매일 같은 공간에서 잠이 깨고, 잠이 드는 공간의 지루함. 집에서 책보거나 글쓰기 싫은 이유다. ‘바깥의 풍경’이 필요한 거다. 카페에 가면,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관찰의 대상이 된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듯.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일을 하는 모습, 혹은 친구와 동료와 가족과 함께 있는 모습, 거기에 더해 화창한 날을 즐기고, 비 오는 날을 느끼며, 눈 내리는 풍경도 간직하는 ‘나’이면서 ‘관찰자’가 되는 즐거움과 더불어 관찰의 대상이 되는 것 또한 나쁘지 않다. 그래서 좋다.
카페 중독자의 삶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