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선물

by 혜윰의 해밀

"달력은 날짜를 세는 종이가 아니라, 한 사람이 시간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심오재일기 ⑪] 2023.12.4.

달력 선물

임미옥


12월이면 차가운 기온보다 달랑 한 장 남은 달력이 마음을 더 시리게 한다. 이 한 장을 뜯으면 한국 나이로 예순다섯. 감사하게도 만 나이로 바뀐 뒤로는 내년 생일 전까지 예순셋이다.


나이듦 자체가 두려운 것은 아니다. 요즘 사람들은 나이듦이나 늙음에 대해 알러지 반응을 보이지만, 나는 그렇지는 않다. 펄 벅의 「대지」에 나오는 계집종처럼 어려서부터 노인을 좋아했고, 루 살로메처럼 노년에도 꿋꿋하게 공부하고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으며, 예순이 다 되어 쓴 석사 논문의 주제도 노년에 관한 것이었다. 다만 이 나이에 돌아보는 내 삶과 글이 아직 여물지 못했다는 자각이, 추위에 홑옷을 입고 선 듯 마음을 을씨년스럽게 한다.


연초에는 올해 안에 적어도 두 권의 책을 내겠다고 마음먹었다. 남의 시 해설을 엮은 책과 내 네 번째 시집이었다. 그러나 7월 이후 코로나 감염과 후유증으로 몸이 먼저 무너졌고, 마음도 함께 꺾였다. 몸이 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진다는 말을 그때 비로소 실감했다.


그래서일까. 요즘 내 관심사는 단순하다. 몸이 쇠하고 죽음의 두려움이 엄습할 때, 어떻게 정신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래도 다시 홑옷을 여미고 서 본다. 부족하더라도 시작은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출판사를 알아본다. 내 가장 치열하고 진실한 문장들, 피와 땀과 살이 밴 글들을 책으로 엮어 문학의 숲에 작은 묘목으로라도 심어 두고 싶어서다.


해 질 무렵, 성당의 두 자매님이 집 앞에 오셨다. 대림시기 저금통과 함께 2024년 성당 달력을 건네주셨다. 얼마 전에는 친구로부터 성모상이 그려진 작은 탁상용 달력도 선물받았다.


새 달력을 받아 들자 마음이 뜻밖에 넉넉해졌다. 마치 열세 번째 달을 선물받은 것 같았고, 새해 열두 달을 미리 손에 쥔 듯 설렜다.


예전에는 이맘때 받는 달력이 가장 긴요하고 고마운 선물이었다. 여기저기에서 다양한 달력들이 건네졌고, 나는 받은 달력 중 가장 예쁘고 멋진 것을 고르느라 고민하곤 했다. 방마다 어떤 달력을 걸지 정하는 일은 중요한 연례행사였다. 그러면 달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새 그림과 함께 새로운 달이 시작되곤 했다.


“새 달력엔 아빠 생일이 들어 있다

새 달력엔 엄마 생일이 들어 있다

새 달력엔 언니 생일이 들어 있다

새 달력엔 내 생일도 들어 있다

새 달력엔 아기 생일이 들어 있다”


어릴 적 즐겨 부르던 「새 달력」 동요가 떠오른다. 그 시절에는 아버지가 가져온 달력을 두고 자매들끼리 좋은 것을 차지하겠다며 다투기도 했다. 그림이 좋은 달력은 오래 간직할 책의 표지가 되었고, 헌 달력은 새 교과서를 감싸주었다. 그러던 달력이 이제는 천덕꾸러기가 된 듯하다.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 하나가 모든 달력을 대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받은 새 달력에는 2023년 12월부터 2024년 열두 달이 모두 담겨 있다. 가톨릭 전례력으로는 대림 첫 주부터 새해가 시작된다. 이때에 맞춰 헌 달력을 걷어내고 새 달력을 건다.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시대이지만, 이 달력에 걸린 달들만큼은 무사히 건너가기를 바란다. 하루하루를 감사로 채우며, 아직 오지 않은 시간 앞에서 더욱 겸손해지기를, 그리고 보다 용감해지기를 조용히 기도드린다.

♤ 노년의 루 살로메

— 늙음은 물러섬이 아니라, 자리의 완성


루 살로메는 말년까지 정신분석 연구와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함께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이 사진은, 그녀가 사유의 주변인이 아니라 동료로서의 노년 여성 지식인이었음을 조용히 증언한다.

♤ 석사학위 논문 표지(2018)

— 노년을 연구하던 시간,

그리고 노년을 살아내는 지금(2025).

나는 아직, 내가 건너가야 할 시간 앞에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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