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릇들에 대한 이해
“그릇은 한 번에 다 씻겨지지 않는다. 죽는 날까지 그때그때, 하나씩 헹굴 수밖에 없다.”
[심오재일기 ⑰] 2026.1.8.
설거지 명상 2
– 그릇들에 대한 이해
임미옥
모두가 식기세척기 찬가를 부르고 모든 것이 기계화되는 요즘, 나는 설거지만이라도 내 손으로 하려고 한다. 기계는 편리함을 주고 수고를 덜어 주지만, 손을 움직이는 과정과 그 결과에서 얻게 되는 정화의 감정까지는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손으로 일일이 그릇들을 씻어내면서 느끼게 되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 또한 기계 사용으로는 알아채기 어렵다.
기분이 왠지 찝찝할 때 설거지를 하고 나면 상쾌해질 때가 많다. 그저 나른하고 만사 귀찮을 때도 싱크대에 쌓인 그릇들을 말끔히 씻어내고 나면, 다시 시작할 마음이 생긴다. 온종일 책과 원고, 텔레비전과 각종 SNS에 둘러싸여 있다가도 적어도 이 시간만큼은 그것들로부터 벗어나 온전히 씻는 행위에만 몰입할 수 있으니, 설거지는 가히 명상의 수단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달리 먹기로 했다. 금세 쌓이는 그릇들을 짜증으로 증오하기보다, 사랑으로 씻어내기로.
그런 마음으로 하나하나 씻어내다 보면 그릇들 저마다의 표정과 성격이 읽힌다. 그릇들이 모두 같은 모양이었다면 설거지는 훨씬 수월했겠지만, 점자를 더듬듯 존재를 이해하는 일의 깊이는 얻지 못했을 것이다.
숟가락들은 얕은 구부림으로 살아가는 평범함을, 젓가락들은 가늘고 뾰족하지만 필요한 것들을 잘 집어내는 영민함을 닮았다. 숟가락과 젓가락은 식사의 파트너지만, 설거지할 때만은 따로 분리해놓지 않으면 뒤엉켜 애를 먹인다. 눌은 냄비처럼 힘이 드는 건 아니지만 잔 신경을 건드린달까. 어느 식당이나 수저 설거지통을 따로 두는 걸 보면, 이 짜증은 나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국자는 더 깊이 자신을 구부려 많은 필요를 채울 줄 아는 지혜 같고, 티스푼들은 예외적으로 날렵한 몸짓으로 제자리를 지키는 영리함이 있다. 포크는 맹수의 이빨처럼 뾰족뾰족하지만, 그렇기에 칼과 함께 정확히 상대를 공략하는 힘을 지녔다.
평평한 접시는 자기를 완전히 내려놓은 뒤 받을 것을 받아낼 줄 아는 사람 같고, 앙증맞은 종지는 작지만 야문 사람, 적당한 크기의 밥공기는 단정하고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가는 사람을 닮았다. 넓적한 대접은 품이 넉넉한 아지매 같다. 넓은 그릇에 된장이며 추어탕이며 퍼 주던, 주부 초년 시절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떠오른다.
“잡것이 만들기는 하나도 제대로 못하고, 만날 설거지만 했당께. 부엌을 얼매나 깨까시 해노코 사는지, 뭐 하기가 무서웠당께.”
주방을 잔뜩 어질러 놓고 무언가를 만들면서 스스로 민망했던지, 자기가 알던 누군가에 대해 하던 말이었다.
치우는 것을 도와주던 나는 괜히 마음이 찔렸다. 마치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 뒤로 이상하게 설거지할 때마다 그 말이 떠올랐다. 사십 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어떤 말들은 그릇에 눌어붙은 밥풀처럼 그렇게 쉽게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책이나 읽고 음악이나 듣고 그림이나 그릴 줄만 알았지, 살림이라곤 제대로 배운 적도 해본 적도 없는 나는 주부가 되자 언제나 그런 부류의 여성들에게 묘한 열등감을 느꼈다. 현실에 발 딛고 살지 못하는 이상주의자의 무능력감 같은 것. 그렇다고 문학이나 예술, 직업에서도 변변한 성취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그 시절의 나는 참으로 유약한 존재였던 것 같다.
그릇으로 치면 먹고사는 데는 별 쓸모 없으면서 폼만 나는 오브제 같은 존재였다고 할까. 그 시절 내 취미가 예쁘고 고급스러운 커피잔을 사 모으는 일이었으니, 어쩌면 나는 그것들을 닮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칫 무신경하게 다루면 손잡이가 나가고, 턱이 깨지곤 하던.
다시 설거지를 하며 이런 기분들도 함께 씻어낸다. 그러고 나면 식기건조대 위에 크기대로 얌전히 엎드린 채 포개진 그릇들이 내게 말한다.
쓸모로 평가되지 않던 시간도 결국 삶의 일부였다.
너는 너대로 잘 살아왔노라고.
그릇은 한 번에 다 씻겨지지 않는다. 죽는 날까지 그때그때, 하나씩 헹굴 수밖에 없다. 삶은 언제나 끝났다고 생각한 자리에서 다시 닦아야 할 것들을 남겨 둔다. 살아 있다는 것은, 결국 이렇게 매번 다시 헹구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릇은 그 안에 담긴 것을 거부하지 않지만, 동시에 그것이 되지는 않는다. 타인의 필요와 감정을 기꺼이 받아들이되, 그 필요나 감정에 잠식되지도 않는다. 그렇게 충분히 받아준 뒤, 그릇들은 설거지를 통해 매번 새롭게 태어난다.
“자기를 깨끗이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주인에게 쓰임 받기에 합당해진다.”
–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2,20–21
건조대 안에 누운 그릇들이 마치 깨끗이 목욕시켜 침대 위에 눕혀 놓은 아기처럼 마알갛다.
♧ 타샤 튜더,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모습, 20세기 중반
– 그릇들 하나에도 표정이 있고, 그 표정을 읽을 줄 아는 손길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