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나서
그새 소복하게 먼지가 쌓여 있었습니다. 벌써 몇년 전, 나오자마자 구해 처음 몇 장 읽다가 더 이상 읽지 못하고 도로 그대로 책장에 꽂아두있던 책이었습니다. 노벨상을 받았다는 말에도 다시 꺼내볼 엄두가 실은 이번에도 도통 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미 그때 <소년이 온다>의 처음 몇 장을 읽고 실제로 아파 몸져 누웠던 적이 있습니다.
끙끙거리며 겨우 겨우 한줄 한줄 읽어 내려가다가 갑자기 뜨겁고 무거운 것이 가슴을 계속 짓누르다가는 결국엔 그것이 이마와 정수리로 솟구쳐 꺼이꺼이 울고나면 나는 몇날 몇일을 열에 달떠 아팠더랬습니다. 이번엔 하지만 몽땅, 끝까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완전무장한 군인과 헬기, 장갑차가 또 다시 그날처럼, 계엄을 빌미로 국회를 침탈한 지 벌써 한달이 넘어가고 있으니까요. 마침 지금, 흐드러지게 꽃 피던, 사람이 지던 그때 광주에 다녀올 일도 있으니까요.
고백하지만, 이번에야 비로소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나는 몇 번이나 더 아파서 누웠어야 했습니다. 세포와 신경에 날아들어 번지는 낱말들은 살과 피를 움직이며 문장이 되어 읽히곤 했습니다. 문단을 건너는 일은 자주 길게 끊기곤 했습니다. 한낱 입을 빌어 전하는 전언이 아닌, 진혼의 언어가 제게 주는 충격은 이토록 물질적인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광주가 아프다'는 말은 제게는 실제 제 몸을 관통하는, 비유를 넘어선 말일입니다.
대체 어떻게 알있지. 순식간에 몸을 뛰쳐나와야했던 혼들의 저 고독지옥을. 몸에 남아서 생지옥을 견뎌야 하거나 결국 견디지 못했던 저 파괴된 영혼들의 절대고독을. 대체 누가 알려주었지. 보여주었지. 속삭여주었지. 누군가는 이렇게 처절한 과거의 영매가 되어 현재를 조금 더 영롱한 것으로 만들어 내려고 이 땅에 작가로 태어나는구나. 그 스스로는 모래가 마침내 유리가 되는 온도를 견디면서 투명해졌겠구나. 끙끙 앓으면서도 참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아버지가 지휘하던 전북의 한 공수부대의 군인가족 관사에서 사춘기를 보냈던 그때는, 그 부대가 어떤 부대인지 나는 잘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왜 불행한지는 더더욱 몰랐습니다. 자신의 피부를 증오하는 사람의 비극처럼, 군복을 입은 아버지가 자신이 군인인 것을 증오하면서도 군인 이외의 것이 되지 못해 슬프다는 것을 알기까지도 아주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마침내 탈주자의 심정으로 집을 떠나 스무살이 되어서야, 지천으로 꽃이 피던 무렵 5월이면 학교 캠퍼스 담벼락에 걸려 잔혹하게 휘날리던 그날의 광주를 보고서야 서서히, 무섭게, 치욕스럽게 알았습니다.
그날, 광주 시내로 진입해 트럭에서 뛰쳐나오던, 시위대를 향해 맹수처럼 달겨들던, 도청에 엎어진 시신들 앞에서 군가를 부르던 군인들의 소속이 바로 익산의 7공수특전사여단입니다. 그리고 2024년 12월 3일, 이 부대는 또다시 시민을 향해 완전무장 한 채 동원명령 대기중이었다고 합니다.
환멸을 끌어안고 안으로 폭파하다 결국 자신의 삶은 물론 가족과 주변의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말았던 '호남출신 퇴역 육군장교' 아버지의 아픔도 광주와 겹쳐지고 나서야, 뒤늦게야 있는 그대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때 '딴따라'가 되고 싶었다던, 젊은 대위였던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던 수 많은 날들 중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날, 나는 이제 막 만 세 살이었습니다. 방금 완전무장을 하고 무장공비 간첩과 교전을 하러 간다며 기약없이 집을 나선 아버지를 배웅하며 안전부절이었을 내 젊은 엄마는 1980년 5월생인 동생을 갖고 만삭이었습니다.
어디 나한테만, 우리 가족들에게만이었겠습니까. 광주가 이렇게도 가득 지천이었는데, 치르지 못한 장례가 많은데, 진혼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너무나 태연하기만 한 땅을 딛고, 광주를 서둘러 수습해 합관하고는 재빨리 청산한 체하는 비정한 도시들에서 살며 늘 생각했습니다. 이건, 정말 아니지 않나.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위선과 비겁이 모눈종이처럼 짜여진 땅의 도시에서 휘청거리며 살다 결국 독일에 왔습니다. 20년도 전 일입니다. 그런데 기어코, 소년이 옵니다. 소년은 하지만 어디고, 언제고 다시 옵니다. 와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