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올 해 부쩍 식료품값이 오른걸 장을 볼 때마다 실감하는 중이다. 연말이 되니 기부를 독려하는 분위기가 많아졌다. 오늘 보니 푸드뱅크에 기부하도록 마련된 봉투마저 올랐더라. 한참전 얘기지만 5달러였을 때 처음 보았는데 그 후 7달러가 된 것도 기억이 난다. 오늘 보니 10달러. 5달러였을 때도 한번도 선뜻 사본 적이 없었지. 그러더니 이젠 무려 두 자리 수가 되었으니 더욱 움츠러들 수밖에.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놓여진 커다란 기부함엔 뭔가가 늘 가득 담겨 있다. 그때마다 세상엔 나같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탓에 그나마 아직 살만한 세상이구나 하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나는 어찌 그리 째째한 걸까. 10달러에 바들바들 떨다니.
김수영 시인의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에 나오는 싯귀가 떠오른다.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이것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요즘 푸드뱅크 기부를 독려하는 캠페인을 미디어에서 접할 수 있다. 1달러면 2끼니를 창출할 수 있단다. 식품으로 하려면 제일 필요한게 캔으로 된 식품과 파스타 소스, 그리고 쌀이란다. 내겐 쌀이 확 다가왔다. 그래 쌀이 내겐 제일 친숙하니 그게 좋겠다. 그런데 밥해놓으면 날라갈 것 같은 긴 쌀일까 내가 먹는 찰진 둥그스런 쌀일까.
오늘은 나도 스스로 압박하는 '째째함'에서 좀 벗어나보기로 하고 입구를 들어서면서 마음을 굳게 먹었다. 대신 10달러는 여전히 내키지가 않아서 일전에 마음에 떠올랐던 '쌀'을 사서 기부하기로. 단, 내가 장보면서 사곤 하는 20kg는 넘 무거우니 소포장으로. 째째함 탈피도 서서히 해야 무리가 없다는 나름 합리적인 명분아래.
계산을 마치고 나오면서 출구 바로앞에 놓인, 이미 가득 쌓인 기부함에 나의 쌀을 사뿐히 올려놓았다. 내 가슴속에 빵빵하게 부푼 당당함을 태연하게 처리하면서. 미처 몰랐는데 쌀은 현미였다. 나는 현미를 선호하지만 기부할 때는 그냥 보편적인 걸 했어야 했는데 좀 아쉽다고 생각했다.
마트에서 나와 주차장에 가서 보따리를 트렁크에 옮기던중 내 눈에 들어온게 있었다. 다른 아이템과 부딪혀 깨질까봐 아래단에 따로 놓은 달걀. 아, 저건 내 영수증 리스트에서 누락된 것... 아 어떡하지. 이건 명백히 절도야. 옳지 않아. 마음 한 쪽에선 이런 소리가 들리는데 한편에선 또 다른 소리가 내게 호소한다. 아까 줄이 길었고 나는 지금 너무 피곤해...
나는 기부에 째째하긴 하지만 이런 의도치 않은 '삥땅'에 쾌재를 부르기는커녕 적잖이 내면의 갈등을 겪는 멀쩡한 시민이건만. 왜 여긴 계산 안된 물품이 나갈 때 삐삐 소리가 안울리는거지? 내면의 갈등을 겪어야 하는 것에 대해 짜증이 솟았다. 아 도저히 돌아가서 긴 줄 끄트머리에 설 엄두가 나질 않는다.
오, 신이시여 혹시 내려다보시거들랑 저의 이 본의아닌 절도행위를 용서하소서. 올해가 가기전에 꼭 만회를 하겠나이다...
결국 나는 오랫동안 마음에만 품었던 푸드뱅크 기부를 남의 돈으로 한 셈이 되었다. 대신 그 마트가 복받아서 내년도 매출 신장을 달성할 수 있도록 빌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