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하는 널싱홈에 한 70대 여성이 있다. 그는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매우 독특한 성격으로 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아니 그러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굴었다. 그가 가진 진단명은 boderline personality disorder. 내가 어렸을 때 엄마따라 같이 보던 드라마에 남자 주인공(당시로는 미남의 상징이었던 노주현 분)의 성질고약한 아내(고두심 분)가 가진 병명이 바로 '경계성 인격장애'라고 했는데 이름도 독특했지만 그 병으로 인한 행동이나 말이 더 그렇다고 어린 시각에도 느껴졌었다.
얼핏 기억으로는 무지 부잣집 사모님이었던 그 환자는 병이기에 남편이 다 뜻을 맞춰주지만 그런 아내에 내심 외로운 중년남자가 다정다감하고 이해심 깊은 젊은 여성을 남몰래 사랑하며 부부의 갈등의 한 요인이 된다. 멀게만 느껴지는 남편에 약이 바짝 올라 아내의 병세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남자의 외로움과 고뇌는 더욱 깊어지는 그런 이야기. 내용이 이렇게나 생생한데 제목은 기억이 안난다.
어쨌든 나는 드라마가 아닌 지금 바로 여기의 그 '경계성 인격장애'자를 상대하며 지치는 가운데 그 드라마를 종종 떠올렸다. 뭐라도 날마다 불평 불만을 쏟아내는 사람인데 줄기차게 반복되는 불평불만은 음식. 널싱홈에서는 개인의 병을 비롯한 조건에 맞게 영양사가 음식의 종류나 형태가 처방되는데 그는 갈아진 형태의 음식을 섭취하게 돼있다. 그의 불만은 이거다. 메뉴판을 받아 원하는 메뉴를 선택할 때 보면 이름만큼은 '팬시'하기 이를데 없는데 정작 음식을 받아보면 'x'같은' 거라고.
이해는 간다. 음식이란 재료 상태가 보여야 음식같을텐데 그걸 곱게 갈아놓으면 모양은 없고 색깔도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리니까. 하지만 개선할 방법이 없는 것을 어쩌랴. 각설하고.
요즘 인터넷이나 매체를 통해 사람들이 하는 일을 일컫는 이름들을 보면서 나는 딱 그녀의 반복되는 그 불평불만을 떠올릴 때가 있다. 참 이름들이 '팬시'하다는 것. 구체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두루뭉실하게 포괄하면서 영어로 되어 있어 뭔가 그럴듯하게 보이는 이름들 말이다. 요즘에 흔하게 눈에 띄는 크리에이터라는 말은 얼마나 멋진가. 그러나 무엇을 '크리에이팅'한다는 것인지 알기는 어렵다. 주로 앞에 '콘텐츠'라는 말이 붙을 때가 많지만 컨텐츠의 종류도 많을텐데 말이다.
그중 더 심한 것은 '인플루언서'다. 영향을 주는 사람이라니.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란 노랫말처럼 '그대 내게 영향을 주는 사람~'이라는 거 아닌가. 그것도 본인 소개를 하면서 '안녕하세요 인플루언서 ooo입니다'하는 경우를 보면 와, 심하게 야심찬 걸 싶은 생각이 든다.
이 '인플루언서'라는 말을 심심찮게 접할 때마다 내 머리속엔 지금은 고인이 된 홍세화 선생의 질문이 떠오른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그리고 무엇엔가에 영향을 받아오면서 내 안에 생각이나 신념, 관념, 가치 등이 형성되고 자리하게 되었다.
가장 처음 부모로부터 시작해 성장기를 거치는 동안 만나는 모든 사람들, 선생님, 친구는 물론 읽는 책, 자신이 살면서 겪은 경험들 모두가 각 개인들에겐 갖가지 '인플루언서' 라고 할 수 있겠다. 매체 등에서 단지 인지도가 높고 그로인해서 고수익을 얻으며 스스로 '인플루언서'라 칭하는 그들이 아니라.
지난 연말 우연히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가장 강력한 것을 보았다. 그 이름은 '라이프 스타일 컨트리뷰터'(life style contributor). 라이프 스타일에 기여하는 사람? 아, 뭐 이건 대적할 것이 없어보인다. 그 '컨트리뷰터'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선물 목록을 추천하고 있었다. 시종일관 경쾌하게 행복에 겨워하는 표정으로. 나는 TV화면속 그녀의 무해한 호들갑을 입을 벌린채 바라보았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라이프 스타일 컨트리뷰터'라는 이름으로 담박에 연결지을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엄마'라는 사람들 아닌가? 엄마야말로 '라이프 크리에이터'이며 '인플루언서'이며 '라이프 스타일 컨트리뷰터'가 아니냐고.
나는 오늘도 넘쳐나는 그 폼나는 명칭들속에 나자신 그런 명칭을 꿰찰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내게 영향을 주고자 하는 것들을 기꺼이 향유함으로써 시류에 발맞출 생각도 하지 못한다. 그저 어지럽고 멀미가 날 지경인 나는 '루저'라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