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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우체국 앞에서

by 오리진

절기상으로야 입추가 지났지만 내가 사는 이곳 캐나다도 그렇고 인터넷에서 접하는 한국에도 가을 소식은 먼 얘기인 것 같다. 그럼에도 아무 이유없이 흥얼거리게 된 노래가 있다.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


너무 더우니까 이제쯤 가을을 기다려서일까. 삼 십년은 족히 된 이 노래를 처음에는 무심코 흥얼거리다 가사가 막히지 않고 흘러나오는 것이 신기해서 좀더 집중해서 나직히 불러보면서 오히려 가을을 떠올려본다. 다가올 일임에도 그것은 그리움. 내 젊은 시절 사랑했던 노래라서일까.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노오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지나는 사람들 같이 저 멀리 가는 걸 보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 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있는 나무들 같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네


무심하게 입에서 나오는대로 불렀지만 노랫말을 음미하니 이렇게 좋은 거였나 싶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라니... 굳세게 버틴 꽃들이며 우뚝 서있는 나무들이 머리속에 그려지면서 한없이 정겨웠다.


그렇게 며칠을 입속에서 맴돌았던 것 같다. 그러다 갑자기 이 노래가 내 무의식 어딘가에서부터 소환된 이유를 알게됐다. 그것은 가을이 아니라 '우체국'에 있었다. 닷새동안 이어진 밤근무를 마치면 집에 바로 가기 보단 나만의 '간지 의식'을 행하곤 한다. 일에서 오는 피로와 긴장 따위들을 털어내고 책의 챕터를 구분해주는 간지를 끼우는 작업.


빈티지스러운 동네 까페에 들러 내가 늘 먹는 '모닝 글로리' 머핀과 커피를 놓고 창밖을 향해 난 자리에 앉아 야금야금 다만 먹기만 하는 의식(?)이다. 여태 몰랐는데 들어가면서 보니 까페 옆이 우체국이었다. 옛날식 우체국. 요즘 누가 편지를 쓰는가. 그런데 가끔 옛날식 편지질이 그리울 때가 있다. 요즘 세상에 편지를 쓰겠노라고 주소를 물어보면 상대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일이지 않을까. 굳이?


우체국을 보고 올여름 내게 편지를 쓸 데가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이 여름에 나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 군대에 자원입대한 아들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 까페에 자리를 잡고 머핀 한 입에 커피를 한 모금씩 마셔가며 편지를 썼다. 그리고 까페에서 나와 바로 옆 우체국에 갔다.


도대체 달랑 종이 한 장 들어있는 이 납작한 우편봉투 하나가 캐나다땅에서 지구 반대편 한국의 논산까지 닿는데 얼마나 걸리는지 나도 모르고 우체국 직원도 알지 못했다. '까똑'하고 거의 실시간으로 소식을 날릴 수 있는 시대에 편지밖에는 어미의 염려와 사랑을 전할 수 없는 상황이라니. 내 안의 그리움을 다 뽑아 봉투에 넣어 부치고 나니 이번엔 새롭게 애틋함이 솟아났다.


우체국에 다녀오니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가 그날 하루 종일 더욱 맴돌았다. 아들 생각을 많이 한 그 날 새롭게 가슴에 다가온 구절은,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더위와 고된 일정속에, 저 꽃들과 나무처럼 굳세게 버티고 우뚝 서 하늘 아래 홀로 설 힘을 얻게 되기를. 남은 여름동안 우체국을 몇 번 더 가노라면 가을이 찾아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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