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일어난 이야기가 아닌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의 기본 조건은 개연성이라고 한다. 그래야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여기에 더해 재미와 감동에까지 이르려면 독창성과 창의력이 있어야 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너무 뻔한 이야기는 흥미를 끌지 못하고 독창성이 지나쳐 너무 특이하면 공감을 사지 못하겠지.
우리가 살면서 순탄하지 않고 별난 일을 겪을 때 '극적이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면 '소설쓰고 있다'고 조롱을 받기 십상이다. 반대로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등에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너무 현실과 동떨어져도 비난을 받는다.
기본인 개연성부터 어긋나고 극중 인물들의 행태가 인간으로서 지나치게 상식에 벗어나면 '막장 드라마'라는 불명예스러운 딱지를 피하기 어렵다. 그런데, 누군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였어도 욕을 먹을만한 에피소드가 넘쳐나는 실제 인물들, 그것도 공적인 위치에 있던 이들의 막장 드라마 스러움을 목격하게 될 때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야 하나.
그동안 숱하게 욕하면서 봐온 수많은 막장 드라마나 영화들에 관객으로서 잠시 참회의 시간이라도 가져야 하나 농을 할 때 입맛은 참으로 쓰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대단했던, 마땅히 대단해야 하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함량미달의 자질과 행태를 접하면서 떠오른 드라마 하나가 있다. 바로 '비밀의 숲'
나는 한국영화는 어떻게든 놓치지 않고 보려고 악착을 부리지만 드라마는 잘 보지 않는데, 몇 안되는 중에 손에 꼽는 드라마다. 요즘 뉴스에 등장하는 특검이니 검사니 하는 기사를 많이 접하다 보니 당시 인상 깊었던 극중 이창준의 생각과 글이 떠올랐고, 다시 음미해보고 싶어져서 유투브 영상을 찾아 받아쓰기해서 적었다.
모든 시작은 밥 한 끼다.
그저 늘 있는 아무것도 아닌 한 번의 식사자리. 접대가 아닌 선의의 대접. 돌아가면서 낼 수도 있는, 다만 그날 따라 내가 안냈을뿐인 술 값.
바로 그 밥 한 그릇이, 술 한 잔의 신세가 다음 만남을 단칼에 거절하는 것을 거부한다.
인사는 안면이 되고 인맥이 된다.
내가 낮을 때 인맥은 힘이지만, 어느 순간 약점이 되고, 더 올라서면 치부다. 첫 발에서 빼야 한다. 첫 시작에서.
마지막에서 빼내면 대사를 치러야 한다.
그렇다면, 그렇다 해도 기꺼이
진리를 쫓아 매진하는 것, 도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 이는 모두 끝이 없는 과정이다. 멈추는 순간 실패가 된다.
변화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
나의 발이 바늘이 되어 보이지 않는 실을 달고 쉼없이 걷는 것과 같다. 한 줌의 희망이 수 백의 절망보다 낫다는 믿음아래 멈추지 않는 마음으로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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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무너지고 있다. 지금 현실은, 대다수의 보통 사람은 그래도 안전할거란 심리적 마지노선마저 붕괴된 후다. 사회해체 단계다. 19년, 검사로서 19년을 이 붕괴의 구멍이 바로 내 앞에서 무섭게 커가는 걸 지켜만 봤다.
설탕물밖에 먹은게 없다는 할머니가 내 앞에 끌려온 것이 있다. 고물을 팔아 만든 3000원이 전 재산인 사람을 절도죄로 구속한 날도 있다. 낮엔 그들을 구속하고 밤엔 밀실에 갔다. 그곳엔 말 몇마디로 수천억을 빨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고, 난 그들이 법망에 걸리지 않게 지켜봤다.
그들을 지켜보지 않을 땐 정권마다 던져지는 가이드라인을 충실히 받아적고 이행했다. 우리 사회가 적당히 오염됐다면 난 외면했을 것이다. 모른척 할 정도로만 썩었다면 내 가진걸 누리며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내 몸에서 삐걱 소리가 난다.
더이상 오래 묵은 책처럼 먼지만 먹고있을 순 없다. 이 가방안에 든 건 전부 내가 갖고 도망치다 빼앗긴 것이 되어야 한다. 장인의 등에 칼을 꽂은 배신자의 유품이 아니라 끝까지 재벌회장의 그늘아래 호의호식한 충직한 개한테서 검찰이 뺏은거여야 한다.
그래야 강력한 물증으로서 효력과 신빙성이 부여된다. 부정부패가 해악의 단계를 넘어 사람을 죽이고 있다. 기본이 수 십 수 백인 목숨이다. 첨부터 칼을 뺐어야 했다. 첫 시작부터.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조차 칼을 들지 않으면 시스템 자체가 무너진다.
무너진 시스템을 복구시키는 건 시간도 아니며 돈도 아니다. 파괴된 시스템을 복구시키는 건 사람의 피다. 수많은 사람의 피. 역사가 증명해 준다고 하고 싶지만, 피의 제물은 현재 진행형이다. 바꿔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이든 찾아 판을 뒤엎어야 한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미 치유시기를 놓쳤다. 더이상 침묵해선 안된다. 누군가 날 대신해 오물을 치워줄 것이라 기다려선 안된다. 기다리고 침묵하면 온 사방이 곧 발 하나 디딜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이다. 이제 입을 벌려 말하고 손을 들어 가리키고 장막을 치워 비밀을 드러내야 한다. 나의 이것이 시작이길 바란다.
당시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이야기보다, 요즘 검사 너머 한층 더 가관인 실체를 접하면서 '비밀의 숲'이 그리워진다. 진실이 모두 드러나면, -필히 '속시원하게' 잘- 실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개연성'은 없는 이 이야기에 작가의 재능과 제작진의 뛰어난 능력이 보태져 잘 만들어진 드라마 '비밀의 숲 3'을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