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이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나는 캐나다에서 ‘널싱 홈(nursing home)’이라고 불리우는, ‘전문적이고 일상적인 건강 관리와 생활 전반에 돌봄을 받으며 거주하는 시설(long term care facility)’에서 일하는 간호사다. 이 곳에는 간호사와 돌봄 인력들이 교대근무를 통해 24시간 상주한다. 병원이 특정 질병이나 증상을 중점적으로 치료하기 위한 곳이라면, ‘널싱 홈’은 치매를 비롯 치료를 통해 완전히 낫는 것이 아닌 질병이나 증상을 가지고 일상생활중 ‘관리’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거나 노화로 인해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하지 않은 개인들이 거주하는 시설이다.
그 날은 오후 2시부터 밤 10시까지 근무하는 날이었다. 사람에 따라 하루에 적게는 한 번에서 많게는 네 번까지 투약이 이루어지는데, 그중 취침 무렵의 마지막 투약 시간이었다. J는 널싱 홈에서 살기에는 비교적 젊은 나이인 쉰 아홉살의 남성이다. 파킨슨병을 비롯한 여러 병을 진단받은 후 식사나 배변, 거동 일체에 전적인 도움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J에게 약을 주고 나서 다음 환자에게 가기위해 카트를 밀며 복도를 지나가고 있던중 어디선가 무슨 소리가 들렸다. 반복되어 들려오는 그 소리가 무엇인지 지나온 길을 되돌아 가보고나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소리의 출처는 J 의 방.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그가 내는 소리였고 놀랍게도 그것은 바로 내 이름이었다! 나는 그 순간 그가 목소리를 가졌다는 사실에 놀랐고, 사람이 목소리를 가졌다는 것에 내가 놀라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으며, 가장 놀란 것은 그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왜 그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랄만한 일일까. 다시 말해,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왜 당연히 모를거라 생각했을까. 순간 뇌성마비 환자들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그들의 신체를 보고 지능마저 낮을 것이라고 잘못 인식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들도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당연히 아닐 것이라고 여긴다는 이야기 말이다.
J 가 가진 파킨슨병은 신경계 이상으로 인해 손떨림 증상을 비롯해 신체가 뻣뻣해지는 등 주로 움직임 기능에 영향을 받는 질병인데, 말이 어눌해지는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J는 이 외에도 여러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휠체어에 앉아 식사보조를 받을 때 고개를 들어 고정시키는 장치를 해야할 정도로 스스로 몸을 가누기 어렵지만, 인지기능은 손상되지 않았기에 자신이 받는 모든 돌봄의 내용들에 대해 선호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달라질 때에 좋고 싫음의 의사표시를 분명히 할 수 있다.
J 는 주변에서 나를 부르는 것을 보고 내 이름을 알 수 있었던 것뿐인데 이전까지 내가 취했던 그 흔한 지레짐작의 건성이 부끄러웠다. 그런데 우습게도 나는 조금은 감동받은 느낌이었다. 3교대를 하며 언제나 누가 됐든 있게 마련인 ‘그중의 하나’로서만 여겨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순간 한국인이 애송하는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불러주는 자와 불리우는 자 사이, 그리고 단순한 몸짓과 꽃이 되는 의미를 새기기엔 나의 일하는 현장은 너무나도 시적이지 못하지만, 나의 사유는 이미 마구마구 비약의 나래를 펼쳤다.
그들은 그저 이러저러한 병을 가지고 이러저러한 약을 처방받은 사람으로서 알러지는 무엇이고 어떤 기능이 가능하고 어떤 부분은 절대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항인지 등등의 정보의 집합체만은 아닌 것이다. 어느 누구와도 같을 수 없는 그들만의 살아온 이야기를 가진 존재로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가지고 있고, 유쾌하거나 그렇지 않은 것들을 느낄 수 있는 존재, 즉,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고유성을 가진 한 개인들인 것이다.
나중에 알아보니 J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데, 힘겹게 표현하는 자신의 말이 상대에게 잘 전달이 되지 않을 때의 언짢음이 싫어서 일부 매우 한정된 사람들에게만 말로써 의사표시를 하는 것이었다. 그 날, 자의식이 강한J가 내 이름을 부른 것은 혹시 내게 ‘말을 트는’ 하나의 시작점이 아니었을까.
나는 비로소 그와 나 사이에 하나의 ‘관계(therapeutic relationship)’가 형성된 느낌이 들었다. 단지 일정 시간에 약을 주고 드레싱같은 필요한 처치를 하며, 건강에 관한 전반 상황을 체크하는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대상으로서만이 아니라, 그 사람만의 고유한 선호나 특징같은 것들을 존중하고 배려함으로써 생기는 신뢰감이 바탕이 되는 관계.
그런 보이지 않는 신뢰를 통해, 현장의 특성상 늘 바쁘게 반복되는 일상의 ‘업무 수행’ 가운데에서도 짦으나마 눈을 맞추는 순간, ‘나는 늙고 병들어 취약한 현재 모습으로 당신을 가치 평가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인간적으로 깊이 공감한다’는 진심이 전해지지 않을까.
그런데 J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찾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부자연스러운 손가락을 움직여 내게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하였지만 나는 정확히 알아내지 못한듯 하다. 짐작되는 대로 이런 저런 시도를 해보았을뿐 그중 하나가 그의 필요를 충족했는지는 알 수 없는채 그의 방문을 나서야 했다.
사소하지만 내 가슴속에 느낌표 하나를 만들어낸 그 ‘호명사건’ 은 내게 작은 변화를 가져왔다. J뿐만 아니라 서른 한 명의 다른 이들을 대할 때, 그들이 표현하지는 않아도 ‘나는 네가 지금 나를 어떤 마음으로 대하는지 다 알’ 것 같다는 경각심이 나를 긴장하게 한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들이 호소하는 크고작은 통증이나 불편함, 감정, 그리고 자잘한 요구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새삼스럽게 재설정하게 해주었다. 즉 그들의 요구나 표현들은 그들 각자에게는 중요한 것이라는 인식아래 진정성을 담아 기꺼이 돕고자 하는 태도. 그것이 참 ‘공감’이며 제대로 된 ‘존중’이 아닐까.
그날 저녁, J는 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나로 하여금 간호사로서의 환자를 대하는 원칙의 초심을 일깨워 주었다. 많은 일들을 바쁘게 처리해내기 급급한 현실속에서 자꾸만 도망가는 초심이 그날 저녁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것을 단단히 간직한 채 마음문을 활짝 열고 그들을 대하는 매순간을 임한다면, 그들의 필요를 이해하는 ‘이심전심력’마저 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