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죽는다는 걸 알면 오늘 기분이 어떨까. 흔히 오늘이 마지막인듯 살라느니 하는 말들이 있지만 병중에 있거나 하지 않으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면서 그렇게 의식하며 살긴 어렵지 않을까. 그러니까 아무도 내일 내가 죽을거라는 생각을 안하면서 오늘을 보낸다는 거다. 자살하는 사람 빼고는.
오늘 아침 6시반에 한 환자의 방에 갔다. 늘상 하듯 아침 인사를 건넸는데 깨질 않았다. 그리고 얼굴이며 피부색이 다른게 느껴졌다. 여전히 코에 산소줄을 낀채 기계소음 가운데. 순간 느낌이 왔다. 여러 지병은 있었지만 어제도 별다른 게 없이 지냈던 사람인데.
곧바로 환자의 사망에 따른 일처리와 늘상 하는 기본적인 일들로 무지 바쁜 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약줄때 물따라 주는 작은 종이컵에 다른 곳에 있던 백합꽃같이 생긴 꽃 조금을 덜어서 담아 다이닝 룸의 그의 테이블에 놓아두었다. 왠지 그냥 그러고 싶어서.
조금 시간이 지난후 그 테이블쪽을 얼핏 보았는데 하나의 프레임이 눈에 들어왔다. 한 테이블을 두고 한편에 놓여진 작은 꽃 한송이와 가운데 쳐진 투명 칸막이 넘어 건너편에 휠체어에 앉아 우는 한 노인 여성. 아, 참 슬픈 장면이었다.
간호사로 일하면서 누군가 세상을 뜨면 숙연해지긴 해도 대개 막 슬프거나 울게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의 우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눈물이 났다. 장례식장에서 와서 시신을 인도해서 나갈때 건물 입구까지 스태프들이 따라나가 입구까지 배웅을 하는데 그도 휠체어에 앉아 나가서 꺽꺽 거리면서 을었다.
인생이란 묘한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들 알 수 있었을까. 자신이 세상을 떴을 때 한평생 모르고 지내던 사람이 노년의 말년이 돼서 들어와 산 시설에서 테이블 벗이 된 인연으로 내 마지막 가는 길에 그리 슬피 울어줄줄을.
간 사람은 간 사람이고 남아서 슬픔에 빠진 사람에 더 마음이 쓰이는건 인지상정이리라. 나중에 그를 찾아갔더니, 힘없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다음사람은 누군지 아느냐며, 자기였으면 좋겠다고. 사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라고 여겨지는 배우자와의 사별도 겪었을텐데. 인간은 다른 인간에 의해서 보살펴질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내 널싱 개똥철학이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인간의 죽음은 다만 다른 인간에 의해서 슬퍼진다는. 나는 내 죽음을 절대 슬퍼할 수 없으니까.
생전에 먼저 떠난 남편은 있었지만 자식이 없었던 고인은 그동안 친구들이 돌보아 주었었고 장례절차도 다 처리하게 돼있었는데 참 점잖고 심성이 선한 사람들이란 느낌이 들었다. 그중 한 명이 내가 테이블에 놓아둔 꽃 이야기를 했다. 그때 나는 알게됐다. 자기 친구가 식사때마다 늘 앉던 테이블을 알고있을만큼 섬세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예기치 않게 떠난 친구의 주검을 수습하러 방문한 길에 그 빈 테이블에 눈길을 줄만큼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일하면서 죽음을 겪는 일이 드문 일은 아니지만 담당자로서 처음 겪으면서 어설프게 임한 것 같아 내게 불만스러워 하던중, 그거 하난 잘 했네 싶은 부분이었다. 거창할 것 없지만 가식없이 한 작은 행동이 있고 그것에 위로받는 마음이 있다는 것에. 삶의 길 끝에 죽음이 있기에 어쩌면 우리는 삶을 느낄 수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 초짜 널스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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