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리진 Nov 07. 2022

초등생의 심폐소생술  

뭐라도 해보이겠다는 의욕의 헛발질을 보고  

여느때처럼 인터넷 신문을 훑는다. 삐딱한 내 눈에 띄는 사진 하나. 어린이들의 CPR교육 받는 모습이었다. 한 눈에 봐도 저학년쯤으로 보이는 애기들이었는데 사진 설명을 보니 초등 2학년이라 했다. 이 학교 교장 선생님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아이들이 뭘 안다고? 라서가 아니다. 연령이 문제가 아니라 가하는 힘의 세기가 중요한 것이라 하니 어린이라서 안될 이유는 없겠지만 2학년이면 만나이로 일고여덟살 아이들이 그걸 한차례 배워봤자 정작 필요한 상황에서 소용이 될 수 있을까. 그냥 한참 어른인 교장 선생님 입장에서 '우린 이런 것도 한다'밖에 뭐가 있을까.  좀 실질적인 일을 좀 하자는 이야기다. 


      (사진출처. 한국일보) 

예전부터 우리 사회의 안전에 대한 감각을 일컬는 말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말은 바로 '안전불감증'이었다. 왜 이번엔 그 말이 쏙 들어갔나. 안전불감증은 주로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하면서 꾸짖음이 가미된 뉘앙스로 많이 쓰인 말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번 경우도 그놈의 고질적인 '안전불감증' 때문이 아닌가. 주최자가 있건 없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계기엔 안전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는 긴장감이 없는 자체가 안전불감증이 아닌가. 즉, 고위 행정 당사자들의 중증 '안전불감증'이 결국 일을 일으킨 것이다. 


우리에게는 '안전'을 따라 암묵적으로 따라다니는 고질적인 정서같은게 있다. 바로 '설마'. 설마가 그렇게 사람을 잡아대는데도 '설마 그런 일이 (또) 일어날라고...'가 들러붙어 있다. 


건설현장앞을 지나다보면 임시 담벼락에 붙여져 있는 구호 '안전제일'이 정말 일상에서 몸에 배어야 하지 않겠는지. 조막만한 손바닥으로 가슴을 힘세게 누르는 것을 몇 번 하게 할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어떤 상황이 안전한지 아닌지 식별하고 판단하는 것부터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안전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상황은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럴때 누구에게, 어떻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지, 또 스스로 안전을 최대한으로 도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해서 일상적으로 아이들로 하여금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안전이란 각자 알아서 '몸조심' '차조심' 하고 마는 사회 분위기에서라면, 매사 안전을 거론하는 사람은 혼자 유별난 사람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그냥 사회 분위기 자체가 안전에 관해서라면 정색을 하고 진지해지는 주제가 되어야 마땅하다. 


케나다의 각 사업장에는 피고용인으로서 갖는 권리중에 이런 것이 있어서 놀랐다. '안전하지 않은 것을 이유로 업무 수행을 거부할 권리'. 2인1조로 하게 되어있는 작업을 혼자 하게 되었을 때 거부할 권리만 행사할 수 있었어도, 앞치마가 자꾸 기계에 끼는 문제를 회사측에서 개선해주지 않을 때 그건 위험하니 오늘은 일 못하겠다고 할 수 있었어도 한참때인 청춘들은 오늘도 작업장에 있었을텐데... 


어릴 때부터 무엇이 안전하고 안전하지 않은지, 내 안전을 지키기 위해 주장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배우고 연습하며 자란 청년이, 안전한 작업 환경에서 일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는 풍토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저 탐욕스런 꼰대 자본가들도 어쩔 수 없이 따라올 수 밖에 없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 그렇게 되려면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저 둔감하고 게을러빠진, 그저 본인 안위를 위해 몸 사리고 눈알 굴리는 고위 꼰대 공직자들부터 고질병인 안전불감증을 물리쳐야 한다. 기필코.   


매거진의 이전글 아, 대한민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