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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진 Nov 30. 2022

e 행복한 세상, '자랑질'에 대하여

나는 인스타그램을 잘 모른다. 계정조차 없어서 남들의 것을 구경조차 해본 적이 없지만 가끔, 아니 자주 미디어에 연예인같은 사람들의 것이 인용되기도 해서 뭔지는 아는 정도. 그곳에 썩 보기좋은 사진을 올리기 위해 꽤나 공을 들이는데 그 정도가, 좋은 사진이 있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멋진 사진을 올리기 위한 삶을 사는것처럼 된 정도라는 것까지 알고있다. 


이를테면 사진을 업데이트하기 위해 맛집을 찾아 소문난 음식을 먹는다든지 유명 여행지에 여행을 간다든지... 그러다가 안전 수칙을 어기고까지 무리한 사진 건지기에 도전하다가 목숨까지 잃는 불상사를 기사를 통해 더러 보지않나. 급기야 'instagramable'이란 신조어까지 접하고 나서는 세태를  짐작하고도 남아 싫증이 확 밀려왔다. 


누구나 즐기는듯 보여도 가끔은 그것을 통해 받는 스트레스로 인해 안하거나 줄여야겠다거나 하는 결심을 하는 이도 드물지 않게 보게되니 좋기만 한 것은 아닌 모양이고 이는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다만 나의 의문은 왜그리 자신의 사생활을 보여주고 싶은지에 있었다. 그러던중 최근 유명인의 인스타그램과 관련해 흥미있는 기사를 접했다. 


호어드 스턴이라는 라디오 진행자가 '오프라 윈프리 쇼'로 유명한 오프라 윈프리를 비판했다고 한다. 오프라 윈프리가 그의 인스타그램에 호화저택인 본인의 집에 역시 유명한 이를 초대해 점심식사를 하는 잠깐의 내용의 영상을 올렸는데 배경으로 보이는 집도 멋지고 식탁도 아름다웠다. 평범한 사람들의 인스타그램에서도 단골로 등장하는 음식은 안보였지만 평소에 그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 왔다갔다 하는 것도 배경으로 보였다. 


스턴은 오프리가 자신의 부를 보여주는 것에 대해 '호어드 스턴 쇼'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깠다'. 

'오프라는 자신의 부를 전혀 쑥스러워하지 않는다'며. 오프라 윈프리는 인스타그램에서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며, 사람들이 그녀의 집과 정원을 보고 그녀를 시중드는 사람들을 보는 것에 아주 신나있다며.  자신은 그런 윈프리가 영 불편하며 사람들이 자신의 부를 과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함께 하는 진행자가, 그녀는 '과시하'(showing off)는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단지 '보여준'(showing)거라 옹호하자 스턴이 하는 말은 이랬다.


 "저 밖에는 (삶에 있어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우리는 알아야 해요." 


인스타그램을 떠나 단순하게 스턴과 그의 공동진행자의 관점으로 보자면, 나는 일단 스턴의 생각에 동의한다. 무심한 삶의 단편을 그저 보여줬을 뿐인데, 달리 말해서 나의 삶의 면면들을 '우호적인' 동기로 '공유'했을 뿐인데, 그것이 워낙 보편이상의 럭셔리함을 바탕으로 한 탓에 불가피하게 과시로 오인되는 부작용을 나았다고 치자. 그로인해 위화감이 생겨났다면, 그것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게시자의 탓일까, 그것을 보고 스스로의 남루함을 다시한번 돌아보는 사람들의 그놈의 낮은 자존감 탓일까.   


여기서 드는 또하나의 의문은 화려한 그들 삶의 일면을 보면서 빈정상하는 것은 누구나 그런 것은 아닌걸까. 그런 모습에는 '좋아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팔로워'수가 엄청 나다면서? 다른 세계에 사는듯한 남들의 화려한 모습에 덩달아 기쁜 '순수'한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게 이상하다면 내가 비루한걸까. 


나는 평소 유치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왜 블로그나 인스타그램, 이곳 브런치에도 반짝반짝한 삶들이 넘쳐나는데 신문을 보면 그렇지 않은가. 시간적이나 정신적인 여유가 있어야 그런 활동들을 할 수 있다고 쳐도 너무 극과 극이 아닌가. 


지난 여름에 한국에 방문했을 때 피상적일지라도 강렬하게 딱 다가오는 느낌은 그거였다. 

화려하고 풍요로운 한국 사람들. 

한국에 머무는 동안 나는 자주 느끼곤 했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어쩌면, (나라) 밖에서 삶을 영위해 가느라고 '고군분투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런 위화감 다음 순서는 상대적인 박탈감인 법. 


이즈음 신문에선 또하나의 참담한 소식이 있었다. 생활고를 비관해 세상을 떠난 엄마와 딸. 내가 쏘다니던 거리 너머 그들은 어디에 있다가 세상을 등지고 마는지. 올 해 언젠가 한가족이 자동차에 타고 물에 투신한 사건이 기억난다. 당시 타고있던 차가 고가의 수입차라서 많은 사람들이 왈가왈부했고 나역시 의아해 했던 비극. 그 가족이 그런 경우라고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상대적 빈곤감이란 사람이 살아갈 힘을 잃는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엔 젊은 나이의 자식을 황망하게 잃는 사람들도 있음을 우리는 이번에 보지 않았나. 아무렇지 않게 자식 자랑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자식을 잃은 이들 입장에선 그런속에 살아가는 일이 지뢰밭이 아닐까. 내가 내 자식 자랑했나? 그냥 이야기했지, 그냥 우리 아이 1등했다고, 서울대 들어갔다고, 삼성에 취직했다고, 아파트 샀다고 혹은 가격이 엄청 올랐다고 등등. 그랬더라도 의도치 않게 어떤 이들에겐 억장이 무너지는 순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내가 과시했나? 그냥 내 사는 일상을 전하다 보니 내 '고품격'의 삶이 보여지는걸 어떡해..였다고 치자. 그럴 때, 내가 남보다 많이 갖춘 줄 알면 자중할 줄 아는 것도 미덕이 아닐까.


다시 스턴의 말을 빌려 마무리 할까한다. 


"당신은 이 엿같은 현실에 대해 조금은 인식해야 해요!" (You gotta be a little bit aware of this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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