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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적인 척, 통제된 하루

우리는 왜 더 자유로워졌는데 더 조심스러워졌을까

by mingdu


지금 내가 근무하는 회사는 비포괄임금제에 유연근무를 하는 조직이다. 많은 회사들이 요즘 그러는 추세이지만 생각보다 아직 보편화되어 있지 않은 제도인 것 같다.


처음엔 무조건 좋다고 생각했다. 이전 회사는 포괄임금제였기 때문에 추가 근무를 해도 급여에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비포괄임금제는 그 몇 시간도 돈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마치 '내 일이 정당하게 평가받는구나' 싶어 뿌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제도를 운영하기 위한 여러 규칙들이 생각보다 빡빡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사무실 밖으로 나간 후 몇 분이 지나면 비업무 시간으로 책정되었고, 의미 없는 야근은 금지되었다.

비업무가 잡히지 않는 휴게공간에서 오랜 시간 머무르지 않도록 권고하는 등의 규칙도 있었다.

당연한 규칙이었지만 이전 직장에서 팀장에게 공유하고 잠시 자리를 비웠던 은행업무, 병원진료 등의 자리비움은 통제되었다.

또한, 업무 비수기 때는 팀원들이나 친한 직원들과 한 번씩 가졌던 커피타임도 비업무 시간으로 책정되므로 서로에게 부담이 되어 가지기 어려웠다.

그런 만큼 확실히 이전 회사들에 비해서는 동료들과 편히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

공식 미팅이 있을 때나 마주 보고 앉아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누군가 먼저 나서서 점심 식사를 하자고 해야 그나마 두런두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회사 분위기 전반에는 개인주의가 짙게 깔려 있었고, 협업보다는 각자의 입장만을 고집하는 경우도 많았다.


무엇보다 가장 씁쓸했던 건, 업무를 빨리 처리하고 제시간에 퇴근하는 사람들과 업무 속도가 느려, 일을 늦게 하거나 계속 야근하는 사람들 간에 보상의 차이가 생긴다는 점이었다.

한 달이 지나고 보면 그런 사람들의 월급은 기존받아야 하는 월급보다 몇 십만 원이 더 책정되곤 했다.

물론 회사도 이런 문제를 인지하고 있고, 너무 과도한 야근에는 제재를 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수준의 야근은 실질적인 업무로 인정되기에, 몇 시간 정도는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는 분위기다.

결국 노력해서 효율적으로 일한 사람이 상대적으로 손해를 보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연 2회 진행되는 다면평가 역시 실효성을 갖기 어렵다. 회사에 큰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특별한 감점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그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게 느껴지곤 한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고 내 할 것 하고 내 시간을 가지자'라는 생각으로 일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한 조직에 속해있는 사람으로서 회사의 규율과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는 없다.


회사는 유연근무제와 비포괄임금제를 도입하며 자율과 공정을 추구하려 한다.

그러나 정작 직원들은 감시받는 느낌에 자유롭지 않고, 일부는 이 제도를 악용해 더 많은 보상을 받아간다.

제도는 있어도 제도가 작동할 수 있는 '신뢰'가 부족한 조직.

그 안에서 우리는 점점 더 타인을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다.


진짜 자율이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문화에서 비롯된다.

회사가 직원들을 믿고, 직원들도 회사를 존중할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제도'는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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