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여섯 살이 되어 초등학교 병설유치원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엄마들 모임’이라는 아주 낯설지만, 무척 궁금했던 그 모임에 가게 되었다. 처음이라는 설렘으로 기다리며, 엄마들 모임에 입고 갈 마땅한 옷을 고르는 일부터 고민이 되었다. 차려입지 않은 듯 세련되어야 하고, 과하지 않은 듯 액세서리도 세팅해야 한다. 그렇게 나간 엄마들 모임. 아이 이름이 호칭이 되어 대화가 시작되니 서로 친해지려는 엄마들의 수다는 거의 방언이 터진 듯했다. 선생님 이야기부터 교육정보까지. 두 시간 정도 앉아 있었던 그 첫 모임에서 기억에 남는 대화는 하나도 없고, 진이 빠졌다. 그런데 함께한 엄마들은 모두 지친 기색 없이 활기가 있고 어딘가 대화를 이끌어가는 것이 노련해 보였다. 나를 제외한 모든 엄마들은 이미 초등학교에 다니는 큰 아이들이 있었기에 이런 모임이 처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영혼 없는 리액션과 기억도 나지 않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어느 정도 누구 엄마라는 존재감을 드러내고 모임은 끝났다.
하지만 진짜 모임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엄마가 되고, 학부모가 된 이상, 모임은 결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았으니 몇몇 엄마들끼리 소모임이 만들어졌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적어도 1년에 2~3번은 공식적인 반 모임도 생겼다. 나는 혹시나 내가 모르는 아이의 학교생활과 학급 생활이 궁금해서 나가게 되는 엄마들 소모임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껏 엄마들 모임에 참여해 마음이 심하게 상해본 경험은 없었다. 하지만 작은 오해들로, 서로의 험담으로, 아이들 간의 부딪힘으로 엄마들 모임에서 상처 받는 엄마들은 종종 봐왔다. 그런 일로 내게 상담을 요청한 엄마도 있었고, 아이가 이미 고학년이 되었지만, 저학년 때 감정이 상한 엄마와 원수처럼 지내는 엄마도 있었다. 입시학원을 운영하면서 다양한 엄마들을 만나기도 하고, 다양한 이야기들을 듣기도 하지만 이런 인간적인 관계는 나에게도 너무 어렵기에 큰 도움이 되어드리지는 못한다. 다만 열심히 들어주고, 내가 건넬 수 있는 최고의 마음 위로를 건네드리려고 한다. 그 이상 도움을 드릴 수 없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아이와 얽힌 관계는 엄마 자신의 문제만이 아니기에 그 복잡하고 힘든 마음이 어떨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리고 생각해보았다. 과연 아이로 인해 만들어지게 되는 엄마 모임, 반 모임에서 마음이 상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하나다. 엄마의 생각을, 마음을 고쳐먹는 것. 절대 그 누군가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해 보자. 내 아이가 성장할 때마다, 반이 바뀔 때마다 소멸될 관계를 일시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어떤 마음 자세가 필요할까? 그렇게 맺게 되는 최소한의 인간관계에 자신의 감정선을 어디까지 둘 것인지, 그 유효기간은 얼마로 할 것인지, 미리 생각해보는 것이다. 마음이 맞지 않고,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분명 감당해야 할 아주 길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긴 하다. 하지만 그 관계 속에 너무 오래 묻혀있지는 말아야 한다. 아이는 2학년 2반, 3학년 3반이 되었는데, 엄마는 여전히 1학년 1반에 머물며 그때 상했던 감정을 스스로 되살리며 관계의 어려움 속에서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학급수가 많은 학교라면 더 빠른 속도로 소멸될 관계다. 엄마들 반 모임, 그 불안의 모임 때문에 쓸데없는 감정 낭비, 시간낭비는 하지 말아야겠다. 마음이 불편하면 안 나가면 그만이다. ‘카더라’ 정보 없이도 내 아이는 잘 큰다. 아이와 같은 반이어서 엄마들끼리 친구가 되는 건 아이가 어려서 스스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친구 개념을 갖지 못했을 때, 그때로 족하다. 초등학교 2학년만 되어도 엄마들끼리 친하다고 해서 아이들이 서로 어울리는 것도 아니고, 아이는 이제 스스로 자신의 마음에 맞는 친구 찾기를 시작한다. 아이에게도 자신만의 친구 개념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어 학년이 올라가면서부터는 조금은 여유 있고 느슨하게 관계를 갖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된다. 내 아이가 학교에서 소중한 친구로 우정을 쌓는 친구가 몇몇 있다면, 학교 공식적인 행사에 부모가 참여할 때, 그 아이의 엄마들과 인사를 건네보자. 연락처도 공유할 수 있다면 가끔 아이들이 학교가 아닌 공간에서 놀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늦된 아이를 학교에 보내다 보니 마음속에는 혹시라도 의사전달 과정에서 아이가 빠뜨리거나 친구와의 소통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도움받을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했다. 아니, 절실했었다. 실제로 그런 도움을 줄 친구 한 두 명 정도의 엄마와 연락처를 교환하니 아이의 학교생활이 궁금하거나 아이의 학교생활에 약간의 삐걱거림이 생겼을 때, 또 아이가 준비할 준비물들을 놓쳤을 때, 도움을 청할 수 있어 힘이 되었다. 반 모든 친구 엄마들과 소통할 필요도 없고, 매번 모임에 참석해야 될 이유는 더더욱 없다. 길어야 1년이면 공유가치가 없어질 정보들을 놓칠까 봐 걱정되어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시간을 쪼개면서까지 참석해야 될 학부모 모임은 없다. 스스로 외로워지고, 마음이 상하고 위축되어 불편해지는 모임이라면 나가지 않는 것이 낫다.
그러나 마음이 잘 맞고, 서로의 인생관이나 아이에 대한 비슷한 교육관을 가진 엄마들의 모임이라면 괜찮다. 함께 하고 뒤돌아섰을 때 즐거움이 남거나 무슨 말을 하고 와도 불안하지 않으며, 때론 나에게 롤모델이 되어주는 엄마들이 있는 모임이라면 그런 모임은 환영이다. 나에게도 그런 모임이 있다. 아이가 여섯 살 때 만난 유치원 엄마들 모임이다. 벌써 햇수로 3년을 넘게 얼굴을 보고 있다. 해가 갈수록 편한 친구가 되어 함께 악기도 배우는 엄마들도 있고, 한 달에 한번 정기적인 모임도 갖고 있다. 아이들과 엄마들 단체로 모여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 우리들만의 운동회를 가지기도 했다. 이제 여행도 계획할 만큼 친분이 두텁다. 최소한 몇 년은 함께 할 수 있는 꽤 긴 유효기간이 보장되는 엄마모임이다. 엄마인 나도, 내 아이도 그리고 그들도 함께 울고 웃으며 성장하는 엄마모임이 되어가고 있다. 결코 지극히 사적인 영역들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적정한 안전거리를 두되, 결코 따뜻한 마음의 거리를 접을 수 없는 모임이 되어가고 있다. 어떤 인간관계든 그렇겠지만 누구 한 사람만의 노력으로는 결코 될 수 없다. 늘 솔선수범해 모임을 진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주머니를 기꺼이 털어 커피 한잔이라도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에 가능하다. 작지만 모임에 나올 때 양말 한 켤레라도, 마스크 한 장이라도, 시골에서 올라온 농산물이며, 집에서 직접 만든 누룽지에, 꽈배기 같은 간식까지 들고 나오려는 그들의 마음을 만날 때마다 나는 가슴이 뭉클하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가을날 날씨가 너무 좋아서 아이들과 밖에서 한번 놀자는 누군가의 제의에 우리만의 ‘가을운동회’가 개최되었다. 공원 운동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너무 놀랬다. 회비 2만 원으로 준비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엄청난 스케일이었다. 엄마 9명, 아이 20명으로 구성된 모임 자체가 만만치 않은데 한 엄마는 아르바이트를 했다며 피자를 주문해 왔고, 어떤 엄마는 큰 귤 박스를 들고 왔으며, 가게를 운영하는 엄마들은 자신의 가게에서 아이들 먹을 것, 아이들 선물까지 준비해 왔다. 놀라운 것은 작은 운동회 상품으로 나눠주고 싶다며 집에 가지고 있던 각종 그릇세트들을 들고 나온 엄마도 있었다. 집집마다 아이들 놀이도구들까지 바리바리. 10월이었으니 아이들 핼러윈 파티를 위한 선물들이 우승 상품으로 준비되었고, 회비로 마련된 음식들과 간식들은 하루 종일 먹고도 남았다. 집에 돌아올 땐 양손 가득한 선물 보따리를 끙끙거리며 가져올 정도였다. 나는 그날 좋은 사람들의 모임이 기적의 마음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나도 좋은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다.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아이를 위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엄마들 각자의 노력은 결국 엄마들도 성장시키고 있었다. 지금도 만남을 유지하며 나보다 나이도 어린 엄마들의 마음 씀씀이에 어찌나 부끄러울 때가 많은지, 얼마나 감사할 때가 많은지... 돌아와 쉼 없이 남편에게 자랑했다.
그렇다면 아이를 키우면서 한 번쯤은 경험할 수 있는 엄마모임, 어떻게 지속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까? 이미 답은 나왔다. 엄마가 즐겁게 나가야 할 모임과 절대로 가지 말아야 할 모임은 정해졌다. 나에게 그 기준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서 받은 좋은 에너지 덕분에 힘이 나는 것이다. 에너지를 넘치도록 충전하고 온 기분이 든다면 오케이다. 엄마인 나 자신도 기분 좋고, 이유 없이 함께 살고 있는 남편에게도 한없이 고맙고, 내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더 많이 사랑을 퍼부어주고 싶은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한 모임. 그 모임은 틀림없다.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은 엄마 자신을 좀 더 성장시키는 시간이 되었음이 확실하니까. 자신에게서 좋은 것들을 찾아 이끌어주고, 부족한 부분은 채워주려는 격려와 위로가 한가득인 그런 모임이었을 테니까. 아무 말 대잔치 같은 엄마들의 수다 속에서도 분명 배울 것들이 많이 있고, 스스로 고민했던 부분들에 실마리를 찾을 때가 있다. 그런 모임에서 엄마는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남편에게 눈을 흘기고, 존재 자체만으로도 귀한 내 새끼를 앉혀 놓고 먹히지도 않을 훈계나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다면 이제 그 모임은 발길을 끊어야 한다. 또 언제나 이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엄마 자신’이다. 그럼에도 이끌리듯 스스로 나가는 아무 모임에서 아무에게나 짓밟힌 그 감정의 쓰레기를 집으로 돌아와 내 귀한 사람들에게 버리는 엄마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나도 수십 번 경험한 일이다. 이제는 즐거움을 주고, 에너지를 주는 그런 자리에서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성숙한 엄마, 언니, 친구가 되어주려고 한다. 늘 마음처럼 쉽지만은 않지만 노력 중이다. 어떤 성격의 모임이든 결국 자신의 노력 없이 지속되는 관계는 유지하기 힘든 법이니까. 지금껏 경험한 학급 모임, 반 모임, 엄마들 소모임들을 모두 생각해보았을 때, 곧 소멸될 모임이라면 그 불안의 모임에서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만약 유효기간이 길어질 것 같은 모임이라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모임이 되도록 자신부터 노력하면 된다. 이것이 슬기로운 엄마모임을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을 만나는 모든 사람이 당신과 헤어질 때는 더 나아지고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하라.”는 테레사 수녀의 한마디를 가슴속에 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