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을 생각하면 걱정부터 앞서는 게 부모다. 그런데 요즘 부모들은 그 걱정도, 염려도 지나칠 때가 많다. 나도 그런 엄마 중 한 사람이었다. 한때는 아이에 대한 염려가 지나쳐 내 아이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가슴을 졸이다가 쓸어내리기를 수차례 겪어야 했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기 전까지는 그래도 나름 여유 있는 엄마였다. 왜? 비교대상이 많지 않았으니까. ‘조금 느리면 어때? 때 되면 다 하겠지? 아이의 성향이 좀 다를 뿐이야.’라고 생각하며 얼마든지 여유 있는 엄마, 인내심 있는 엄마인 척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실제로도 그렇게 조급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또래 아이들을 스무 명 남짓 모아놓은 유치원에서 내 아이의 모습은 한없이 어리고, 부족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다른 아이와 비교해 조금만 다른 모습이 보여도 걱정이 앞섰다. 친구들 무리 속에 끼지 못하고 혼자 놀고 있어도 걱정, 그림을 그리거나 종이접기 같은 시간에 제대로 된 작품을 완성하지 못해도 소근육 발달에 문제가 있나 걱정이 되었다. 아이가 체육활동 시간에 매번 꼴찌로 활동을 마칠 때는 태권도라도 시켜야 하나? 별 걱정을 다했던 것 같다.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다 못해 넘치는 아이들을 보면 ‘도대체 저 아이 엄마는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도대체 뭘 먹이고, 어떻게 키웠길래 아이가 못하는 게 없어?’ 하는 생각까지 들곤 했다. 아이에 대한 염려가 지나칠 때는 가차 없이 ‘정서 장애, 발달장애, 학습장애, 행동장애, 경계선 아이, 유사 자폐’ 등과 같은 단어들을 머릿속 한 가득 채워가며 관련 키워드에 맞춰 증상을 찾아보고, 관련 책들을 읽기도 했다. 세상에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책까지 읽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과잉 염려 증후군 엄마’라는 진단을 내리고 엄마가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 아이를 돕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워낙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이 많아서 가족 외엔 누군가에게 잘 다가가지 못하고, 말이 조금 늦은 아이였을 뿐인데 엄마의 염려증이 아이를 장애로 만들 뻔했다. 나는 한때 아이의 발달 상태를 정확히 알기 위해 아이를 데리고 병원과 심리센터, 언어치료 센터까지 방문했다. 그러나 기관마다 모두 결과가 달랐다. 아이의 상태보다는 엄마의 말에 기준을 삼고 상담의 초점을 두기도 했고, ‘제 아이라면 저는 좀 더 지켜보는 쪽을 택하겠어요.’라고 말해주는 선생님도 계셨고, 때론 아이의 성향상 뭔가 적극적인 방법으로 개입하면 말문을 닫아버릴 수도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한 소아과 선생님은 내게 엄마가 체크하신 사항들로만 보면 아이가 지금 ‘멍’ 때리고 있어야 하는 상태인데 전혀 그렇지 않죠?라고 하시며 내게 ‘우리 아이는 늦된 아이다.’라는 말을 따라 하게 하셔서 진료실에 한순간 폭소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한 언어센터에서는 아이의 언어발달 상태나 발음 상태가 또래보다 1년 정도 늦으니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빨리 치료를 해주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자연스럽게 사회성 발달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조언과 함께. 나는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해서 이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정말 걱정이 된다면 엄마의 주관적인 판단보다는 전문가의 조언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 하지만 경험에서 나온 어설픈 엄마가 한마디 덧붙이자면 ‘아이는 분명 바라보는 대로 된다’는 사실이다. 엄마가 내 아이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아이의 모습은 정말 엄마가 향하는 시선으로 많이 닮아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렇게 느껴질 뿐이겠지’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느낌만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엄마인 내가 내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정말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의 기준이 오직 ‘내 아이’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더 이상 내 아이가 누군가의 비교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되다 보니 단 한 아이, 내 아이만을 위한 방법들을 찾게 되고, 오로지 내 아이의 수준에 맞춘 엄마표 책 읽기, 엄마표 교육, 엄마표 놀이들을 생각해내게 되었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그저 대단하게만 보이던 엄마표 주자들의 포스팅들이 더 이상 눈에 들어오거나 그것들이 나를 위축시키지도 않았다. 엄마들보다 더 대단해 보이던 그 집 아이들의 활동이나 작품들이 부러움의 대상으로 나를 힘들게 하지도 않았다.
언젠가 초조한 모습으로 위태로운 육아를 이어가던 내 모습을 바라보며 친정 엄마는 말씀하셨다. “참, 요새 엄마들은 아는 것이 많아서 진단도 잘 내린다. 우리가 애 키울 때는 공부를 못하면 못하는 대로 다른 잘하는 것이 있겠지 했고, 다른 집 애가 산만하면 좀 부잡스럽다 생각했고, 말도 없고 숫기도 없어서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면 속에 영감이 들어앉았구나 생각했지... 그런데 요새 엄마들은 걸핏하면 내 새끼든, 남의 새끼한테든, 학습 장애니, 주의력결핍이라니... 몹쓸 말들을 갖다 붙이더라. 그럼 못써. 어미들이 그렇게 미리 걱정하고 진단 내리고 하니까 요새 멀쩡한 애들을 장애 만드는 거야. 세상이 이렇게 좋아졌고, 애도 한둘밖에 안 낳으니 온갖 정성으로 좋은 것만 먹여 키우는 요새 애들이 우리 때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겠냐? 굳이 붙이려고 들면 우리가 애들 키울 때 ‘장애’가 더 많지 않았겠어? 알고도 모르고도 그냥 지나갔으니까, 새끼들이 저들 알아서 밥 먹고 살고, 사람 구실 할 만큼 컸지. 안그냐? 어쩌게 저그 새끼들한테 그런 말을 그냥 막 갖다 붙이냐? 우리들은 많이 못 배웠어도 그런 말은 입 밖에 안 내고 키웠어야. 너는 배울 만큼 배웠고, 엄마보다 똑똑한 게 당최 니 새끼한테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도 말고, 생각도 말어. 알겠냐?” 한참 야단하시더니 아직도 하실 말씀이 많지만 오늘은 이쯤 해둔다는 듯이 마지막 혼잣말을 나직이 흘리신다. ‘걱정이 많아도 탈여.’
정말 그렇다. 과잉 염려는 천재를 장애아로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부모나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바라보고, 그렇게 대하기 때문이다. 조기 진단이 필요한 경우도 분명 있지만 많은 경우 부모의 과잉 염려로 더 힘든 아이들이 많은 요즘이다. 절대 과잉 염려는 금물이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기준과 틀에 끼워 맞추다 보면 어느 곳 하나쯤 문제없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한때 언어발달이 늦은 아이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1년 남짓 관련 책들을 집중적으로 읽어 내려가면서 그 책 속에서 나의 어린 시절 모습뿐만 아니라, 지금의 모습들이 너무 많이 발견되고 나타나서 스스로가 수많은 장애와 결핍이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어쩜 이렇게 모든 면에서 기준이 미달되고,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내 역할을 해내며 살아가고 있는 나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생각해보았다. 내가 한때 내 아이를 바라보던 시선으로 똑같이 나를 바라보는 좀 더 예민하고 걱정 많은 부모님을 만났더라면, 나는 과연 지금처럼 자유롭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어른이 될 수 있었을까? 많이 배우고, 먹고살기 걱정 없고, 자식이 귀한 집의 그런 딸이었다면 과연 지금의 나로 살아낼 수 있었을까? 아찔한 순간이 스친다. 그리고 지금껏 내 모습 그대로 바라보며, 어린 시절 내게 부모님께서 늘 해주셨던 말씀, “너는 어디다 내놔도 걱정 없다. 엄마, 아빠는 널 믿어.” 그 말씀을 입버릇처럼 해주셨던 부모님이 내게는 계셨다. 그런 부모님 덕분에, 나는 오늘도 감사함으로 내 아이의 좋은 엄마를 꿈꿔본다.
세상의 기준으로,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틀 속에서, 사회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내 아이를 판단하지 말자. ‘장애’, ‘문제아’라는 딱지를 내 금쪽같은 자식에게 함부로 붙이지 말자. 멀쩡한 아이의 특별한 개성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우는 것이 오히려 부모로서의 역할이 아닐까? 한 정신과 의사는 젊은 날 자신이 깊은 생각 없이 내린 자폐증 진단을 받은 아이가 너무나도 멋진 청년이 되어 나타났을 때, 스스로 부끄러웠다는 고백을 하며 ‘자폐적 증상도 그 아이 나름의 개성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상한 것과 개성을 자신 있게 구별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 그는 사실 전문가도 구별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천재와 정신병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까지 말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참 큰 위로를 받았다. 그의 따끔한 충고로 반성의 시간도 되었고, 가슴속 가득 남겨지는 그 어떤 마음의 기운으로 한동안 감동의 여운까지 느끼며 책장을 덮었던 기억이 난다. 다른 아이들 속에 내 아이가 묻혀 있어 표가 나지 않아야 안심이 되는 부모가 되고 싶은가? 한때 나는 그랬다. 내 아이가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고 평범하게, 무난하게 섞이길 바라는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그러나 이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누가 뭐래도 이젠 개성시대가 아닌가? 자기만의 독창적인 생각을 가지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아이는 어쩌면 누구도 갖지 못한 신이 주신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거머쥔 아이일지도 모른다. 당신의 아이는 원래 천재였는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찬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자. 모두가 주연으로 살아도 부족함이 없는 기회의 세상이 되었다. 1인 미디어, 1인 기업가의 세상에서 내 아이를 들러리로 살아가게 만드는 좁은 시야의 부모는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이야기로 마무리를 해볼까 한다. 그는 어린 시절 학습 지진아라는 판정을 받았다. 유난히 호기심 많고 질문이 많은 아이는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이상한 시선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자신을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라봐주던 어머니, 파울리네가 있었다. 남들과 똑같아서는 큰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말해주는 어머니의 격려 속에서 비록 16살이 되도록 특수한 재능을 보이지 못하던 그가 독일을 떠나 스위스의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곳에서 만난 선생님들은 독일에서와는 달리 그를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그는 물리, 화학, 철학 등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 아이가 갈 길, 내 아이가 설 자리는 분명히 따로 있다. 평범함에 묻혀 아이의 특별함을 바라보지 못하는, 기대하지 못하는 엄마가 되지 말아야겠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다는 마음속 우선순위에 기대에 찬 엄마의 눈빛을 제일 우선으로 두어야겠다는 다짐도 함께 해본다. 내 아이는 엄마가 제일 잘 안다는 자신감이 생길 때까지, 부모로서 아이를 어떻게 가르치고 인도해야 할지 늘 명심하며 아이가 세상에 자신의 설 자리를 찾아갈 때까지 힘껏 돕는 엄마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