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대로되는사람 Oct 21. 2021

내 새끼는 내가 키운다

  세상엔 참 대단한 엄마들이 많다. ‘엄마표’라는 말이 무슨 유행어처럼 다양한 영역에 붙는 것을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외국어부터 그리기, 악기, 운동, 놀이 등 그 범위가 어찌나 다양하고 넓은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엄마가 되고 아이를 키우면서 어쩌면 엄마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동안 꿈꿔보지 못했을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는 엄마들도 적지 않다. 아이를 가르치기 위해 아이와 함께 시작해 5개 국어를 하는 엄마, 아이와 놀아주기 위해 다양한 놀이 활동을 하면서 놀이연구가가 된 엄마, 아이의 느린 언어를 돕다가 언어치료사가 된 엄마까지 세상엔 정말 대단하다 못해 경이로운 엄마들이 있었다.


 아이를 통해 아이와 함께 자신의 자아실현을 완성해가는 엄마들을 볼 때마다 부러움과 존경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다. 나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세상에서 엄마표가 제일 힘들다는 것을 이미 몸소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름 교육현장에서 다른 집 아이들을 몇십 년씩 가르쳐왔던 엄마가 아닌가? 그런데 내 아이는 달랐다. 나는 내 아이 가르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선생님이었다. 어쩜 이리도 힘들까? 인간의 욕구의 최정점인 자아실현 욕구는 엄마라는 이름으로는 이루려고도, 꿈꾸려고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당최 노력의 흔적도, 끝도, 결과물도 내지 못하는 이런 엄마표라면 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워킹맘으로 그나마 없는 시간 쪼개서 시도한 말만 엄마표였던 수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간다. 늘 꾸준함이 따라주지 않고, 인내심이 따라주지 않는 나의 엄마표는 시간이 없어 제대로 안되고 있다는 합리화로 끝났다. 워킹맘으로 살지 말아야 할 이유들만 잔뜩 늘어놓고 쌓아가게 했다. 그러나 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일을 쉬어도 내 아이를 엄마표로 도울 수 있는, 완성할 수 있는 영역이 매우 적다는 것을 이미 몇 차례의 흉내 내기 엄마표로 알았고, 그나마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식이라고는 딸랑 딸아이 하나밖에 없는 나에게 왜 최고로 잘 키워보고 싶은 욕심이 없었겠는가? 정말 엄마표 놀이 책들과 파워블로거 포스팅, 엄마들 카페 등을 검색하며 문방구를 들락거리는 날들이 매일 같이 이어졌다. 하지만 정작 엄마인 내가 종이 접기가 안되고, 그리기가 안 되고, 만들기까지 제대로 되지 않으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주 간단해 보이는 것들도 어렵게 느껴지면서 즐겨지지 않았다. 차라리 시작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결말들로 끝나는 날들이 많아졌다. 안된다고 다그치고, 집중 안 한다고 짜증내고, 재미없다는 아이 말에 놀이 준비하느라 고생한 내 노력의 시간들이 떠올라 눈을 흘기고, 결국 끓어오르는 성질을 잠재우며 모든 놀이 공간을 정리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내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매번 엄마표 놀이는 별 소득 없이 이렇게 끝나니 ‘뭔 엄마표 놀이냐’ 하는 자포자기 마음으로 아이에게 되묻곤 했다. “기쁨아, 뭐하고 싶어?” 그러면 여섯 살인 아이는 어김없이 달리고 쫒는 토끼 놀이, 늑대 놀이라고 이름 붙인 놀이들만 외쳤다. 여자아이인데도 다른 여자 형제 없이 남자 사촌오빠들과 가까이 자라서인지 늘 몸으로 하는, 땀을 흘리는 놀이들을 좋아했다. 그림도 그리고, 만들기도 하자고 하면 좋으련만 자신이 꽂힌 한 가지 놀이에만 집중하는 아이가 한심하게 느껴지면서도 결국 아이가 원하는 놀이로 서로의 감정을 풀고, 마무리. 이것이 나의 엄마표 놀이였다. 이것저것 시도해 볼만한 수많은 육아서와 블로그들의 엄마표 놀이 대신 정신줄 놓고 그저 달리고 쫒는 놀이 같지도 않게 느껴졌던 그 놀이들을 하면서도 엄마인 내 머릿속에서는 말이 늦으니 ‘역할놀이’를 해볼까? 소근육 발달이 늦으니 손가락 움직임이 많은 놀이로 변형해볼까? 이런 오만가지 생각들로 머리를 굴리며 놀이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나 자신이 한심하다가도 엄마라서 또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놀이만이 아니었다. 나의 엄마표 학습도 수많은 다른 엄마들의 성공스토리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것에서 오는 좌절과 실망감도 나에게는 늘 마음의 짐이었다. 엄마인 나에게 지금의 딸아이 모습은 불과 2-3년 전만 해도 상상이 되지 않을 만큼 발전된 모습이지만 아웃풋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그 시간은 정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간이었다. 육아는 정말 기다림과 인내의 시간이라더니 그 말이 맞다. 정말 시간이 약이 되어주는 수없이 많은 육아 경험의 시간들을 통해 나는 이제 시간의 힘을 믿는다. 


 내 보물 같은 아이는 너무나도 늦은 아이여서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해 주고, 많은 책들을 읽어줘도 늘 엄마가 방치해서 키운 아이처럼 노력의 표가 나지 않는 아이였다. 육아서나 파워블로거 속 대부분 아이들은 엄마의 노력이 확실히 표가 나서 어쩌면 그렇게도 똑똑하고, 잘 키웠다는 소리를 들을만한지... 뭘 가르치고, 도와주면 어디 하나라도 남다른 모습을 보여 줄 거라는 엄마의 기대감은 늘 순식간에 무너졌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만큼 답답한 시간이었다. 많은 것들을 기대하는 엄마도 아니고, 아이가 성장하는 단계마다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을 기대했던 엄마인데... 아이가 어릴 때는 내 아이와 다른 아이를 동시에 바라보는 일이 심적으로 참으로 힘들었다. 늘 내게 심란한 마음을 가져다주었던, 어딘지 모르게 아픈 마음을 가져다주던 그런 시간이었다. 때론 화가 치밀어 올라 혼자서 속으로 세상의 모든 똑똑한 아이 키우는 엄마들에게 외치기도 했다. ‘너희들도 나처럼 늦된 아이 한번 키워봐.’ 그 엄마들이 무슨 죄란 말인가? 지금 생각해보면 참 답답했던 모양이다. 말이 늦되어 언어가 아닌 떼로 자신의 의사표시를 하는 아이와 외출할 때면 ‘애를 도대체 왜 저렇게 키우나.’하는 따가운 시선도 감당해야 했다. 뭔가 다른 시선이 느껴져 아이에게 화라도 낸 날이면 또 미안한 마음에 하루에도 수십 가지의 감정이 교차했다. ‘정말 나는 엄마도 아니다, 미친년이다.’ 생각하며 잠든 아이를 바라보면 가슴에서 흐르는 뜨거운 물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또다시 무너진 마음을 독하게 추슬렀다. 그런 날이면 엄마표 놀이든 엄마표 학습이든 ‘내 새끼는 내 방식대로 키운다.’는 각오로 마음부터 챙겼다. 그리고 세상에 성공한 모든 엄마표를 쫓아가려 했던 많은 활동들을 집어치웠다. 아웃풋이 빨리 되지 않는 내 아이와 성질 급한 엄마인 내가 할 수 있는 우리만의 방법을 찾는 것이 더욱 현실적인 대안이 될 것 같았다. 내 눈엔 영재에 가까운 그 블로그 속, 육아책 속 아이들과 내 아이를 비교하며 아웃풋을 끊임없이 기대하는 나 같은 엄마는 절대로 다른 엄마표를 따라 하는 육아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것이 장거리 마라톤 육아를 즐길 수 있는, 감사할 수 있는 육아법이며, 정신건강에 좋다. 그렇게 아이가 일곱 살 중반을 넘어서면서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잠시 ‘쉼’을 가졌다. 그리고 다시 엄마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했다. 내가 ‘누구 엄마요.’하고 아이를 자랑삼아 목에 걸고 다닐 것도 아닌데, 내 아이를 통해 엄마의 자아실현을 꿈꾸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아이와 내 삶에 걱정스러운 마음을 기쁜 마음보다 더 크게 안고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왜 늘 흔들리며 소신 있게 아이를 키우지 못하고 있는지 생각하고, 반성하고, 고민하며 내 아이만을 위한 엄마로 살아갈 계획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조급하지 않고 내 아이의 속도에 맞는 나만의 엄마표로 조금씩 아이를 도울 수 있는 활동들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한동안은 정말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기 위해 컴퓨터도 켜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의 마음은 다시 평온을 찾아가며 단 한 아이, 내 아이만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인생철학처럼 믿는 한 가지, ‘이름 앞에 붙이는 닉네임이 사람을 만든다.’는 생각을 하며 내 아이 이름 앞에 <꿈대로 되는 아이>라는 닉네임을 떡하니 붙여주었다. 그 순간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처럼 아웃풋이 안 되고 느린 진짜 이유를 가슴속 울림으로 들을 수 있었다. “내 아이는 느린 아이, 느린 아이는 잠재력이 큰 아이”, “내 아이는 그릇이 큰 아이, 그래서 채울 것이 많아 넘치는데 시간이 필요한 아이”, “내 아이는 꿈대로 되는 아이, 그 꿈의 크기가 큰 아이”... 이런 울림들이 가슴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엄마로서 살아갈 새 힘을 얻게 되었다. 다시 리셋된 엄마의 가슴속에 그 울림들을 여러 번 새기며 나는 진짜 내 아이만을 위한 엄마가 되어갈 수 있었다. 

이전 03화 아이의 '느림'은 엄마의 '부끄러움'이 아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