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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대로되는사람 Oct 10. 2021

아이의 '느림'은
엄마의 '부끄러움'이 아니다

  아이의 ‘느림’이 불러오는 많은 상황들을 겪어오면서 나는 강한 엄마, 인내심 있는 엄마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경험해왔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이의 발달 정도와 성향을 전혀 알지 못해 저지른 엄마의 만행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절대로 내 아이에게 가르쳐주되, 강요하지 않으며, 기다려주되, 비난하지 않는 엄마가 될 텐데 말이다.


 아주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란 엄마는 ‘사람을 가르치는 기본은 인사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어디를 가든 인사는 꼭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거기까지만 했어야 했다. 하지만 유난히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는 사람들과 마주치면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엄마 뒤로 숨기 바빴다. 엄마인 내가 먼저 큰 소리로 인사하는 모습을 보여줘도 소용이 없었다. 아주 어린 나이도 아닌 유치원 아이가 인사를 안 하니 엄마 마음에 마치 자식을 오냐오냐 떠받들며 잘못 키우는 듯한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누군가 ‘기쁨 이는 언제나 아는 척을 해줄까?’라는 말을 했을 때, 나는 아이에게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어? 어른을 보면 인사를 해야지.” 하며 온갖 걱정스러운 말들을 늘어놓으며 때론 독한 말들로 아이를 다그치기도 했었다. 아이가 얼마나 부끄러우면 그럴까? 를 생각하기에는 엄마의 욕심과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이가 인사를 안 하는 것이 엄마의 ‘부끄러움’ 인양 나는 참 열심히 아이와 실랑이를 벌였던 것 같다. 아이는 이후에도 누군가에게 먼저 인사 건네는 것을 어려워했지만 엄마인 나는 지친 마음 반, 기다리자는 마음 반으로 내려놓았다. 그런데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 한 학기를 마치고 받아온 선생님의 평가란에 적힌 ‘아이의 인사성이 매우 바르며...’라는 문구를 발견했을 때 나는 놀라움과 감사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이게 웬일인가? 아이는 서서히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6세에 도덕성이 발달하지 않으면 문제가 될 것처럼 말하고 사회성에 문제가 생길 것처럼 말했던 수많은 전문가들의 조언을 믿었던 엄마는 순간 부끄러웠다. 아이에게 가르쳐주되, 강요하지는 말았어야 했고, 기다려주며 비난하지는 말았어야 했는데... 아이의 아웃풋 시기는 모두 다른 것이니까. 그저 부드러운 말로 지나가듯 알려주기만 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이의 ‘느림’이 결코 엄마의 ‘부끄러움’이 아니라는 사실을 왜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을까?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참 다양한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내가 만난 수많은 아이들 중에는 정말 뛰어나지만 늘 자신감이 부족하고, 작은 일에도 쉽게 위축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는데도 항상 자신감이 넘치는 아이도 있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말수도 적고 친구관계도 좁은 아이지만 자신의 일에 책임감이 강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뚜렷한 아이를 만날 때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성격이 굉장히 활발해서 친구관계가 넓은 듯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들에는 친구 없이 늘 혼자이고, 그 상황을 잘 견디지 못하는 아이도 보았다. 그런데 그 어떤 모든 경우를 보더라도 가장 안타까운 아이는 늘 다른 아이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행동하고, 그 무리에 끼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며 자신을 잃어가는 그런 아이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년이 올라가도 몇몇을 제외하고는 성향 자체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아이의 타고난 성향의 문제도 있겠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경험하게 되는 환경의 영향도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래서 기관에서 사회성 외에 여러 가지 교육활동들이 이루어진 다하더라도 어떤 상황에서든 학령기 전 아이에게 심리적, 정서적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은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고 평생 안고 가야 하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물론 나는 교육학자도 아니고, 유아교육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지만 학령기 전에는 가정에서든, 기관에서든 아이의 학습이나 교육적인 부분보다 아이의 발달을 고려한 정서나 심리적인 부분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왜 엄마가 되고 나서 내 아이에게는 이렇게 이해심 없는 바보 같은 엄마가 되었을까? 아이들마다 정말 말 안 듣는 반항기가 있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다. 도저히 고집을 꺾을 수 없을 때도 있고, 널뛰는 감정에 어떻게 반응하며 교육해야 할지 막막할 때도 있다는 것을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그리고 그 시기는 모든 아이가 같지 않다는 사실도. 이 모든 것들을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잘난 척하던 엄마가 나였다. 그런데도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 놓고 나니 내 아이만 바라보던 때와 달리, 다른 아이들과 함께 비교되어서 내 아이가 보이니 나도 별수 없이 형편없는 삼류 엄마의 모습을 그대로 재연하고 있었다. 아이의 늦됨을 잊은 엄마는 온갖 것들을 아이에게 들이대기 바빴고, 다른 아이들과 발맞추려 온갖 시도들을 머릿속으로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내 아이만을 바라보기까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을 겪어본 것 같다. 그래서 마음을 돌려 다시 시작했다. 다시 한번 아이를 키운다는 생각으로 내 아이의 눈빛, 내 아이의 언어 속도, 내 아이의 마음소리에 귀 기울이려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점점 진짜 내 아이의 모습이 눈으로 보이고 들리기 시작했다. 


 엄마로서 내가 변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도 선생님이나 운영자의 입장이 아닌, 엄마 같은 마음과 시선으로 바라봐질 때가 많아졌다. 엄마들과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겼다. 늦된 아이를 키우며 좌충우돌해보니 엄마의 마음으로 만나는 다른 엄마들의 마음이 좀 더 안타깝게 다가올 때가 많아졌다. 상담을 하며 그들의 마음이 내게 전해질 때는 이미 아프게, 모질게 겪으며 지나온 시간들이 떠올라 울컥할 때도 있다. 학원을 운영하다 보니 참 많은 엄마들을 만나게 된다. 특히 학습 진도가 많이 늦는 저학년 아이들의 엄마들을 만날 때면 그 답답함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아무리 가르쳐도 한글이 늘지 않아요.’ ‘연산이 안돼서 걱정이에요.’, ‘집에서 이것저것 많이 시켜보는데도 안돼요.’, ‘너무 늦게 시작해서 못 따라가면 어떡하죠?’ 이런 걱정스러움에 이어지는 엄마들의 말속에는 다른 아이들보다 내 아이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도 함께 있음이 느껴진다. 하지만 실제로 아이들을 만나보면 아이들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한글은 잘 모르지만 수학을 잘하는 아이도 있고, 수학은 잘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말로, 글로 잘 표현하지 못하는 이이도 있다. 여러 번 설명을 해도 항상 엉뚱한 답을 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글씨를 또박또박 소리 내어 읽는 것에 어려움이 있는 아이가 일상적인 말을 할 때는 참으로 여러 방면에서 많은 지식들을 쏟아내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내 아이를 키우면서, 그리고 다른 많은 저학년 아이들을 만나 오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아이의 나이가 한 자리일 때는 그 ‘느림’이 결코 느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조금 느린 듯 하지만 엄마의 끊임없는 관심과 응원이 있다면 아이의 내면에서 아이의 잠재력과 함께 아이의 도덕성도, 사회성도, 학습능력도 함께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대나무의 죽순이 오랜 기간 성장을 안 하는 듯 하지만 어느 순간 확 자라나는 것처럼 분명 늦게 피는 꽃 같은 아이들이 있다. 가끔 고학년이 된 그 꽃 같은 아이를 바라볼 때, 이미 그 아이의 꽃봉오리 시절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흐뭇한 미소와 놀라움의 미소가 지어질 때가 참으로 많다. 


 아이의 ‘느림’은 결코 엄마의 ‘부끄러움’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곱지 않은 시선이 느껴질 때에도, 걱정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더라도 늦게 아름다운 꽃으로 피워낼 내 아이의 꽃봉오리를 함부로 만지거나 꺾어버리는 조급한 엄마는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내 아이의 꽃이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도록 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도와줄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은 해주자. 아이에게 햇빛이 되어주기도 하고, 적당한 물도 주고, 잘 자라도록 아이 내면에 거름이 될 수 있는 것들도 채워주자. 분명 자극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자극이 늦게 아름답게 피워낼 내 아이의 꽃에 방해가 되는 자극이어서는 안 된다. 너무 많은 간섭으로 스스로 자랄 힘을 잃어버리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예쁘고, 귀하다 하더라도 어린 꽃봉오리를 너무 많이 만져서도 안된다. 눈으로 바라보고, 입으로 응원하고, 잘 자랄 수 있는 적당한 자리에 머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엄마로서 어린 내 아이를 편견으로 가득한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보호하고 아이의 모든 발달 영역에서 능력이 발현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어야 한다. 아이가 엄마로부터 신뢰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언제나 우선이어야 한다. 나는 그것을 좀 더 일찍 깨닫지 못한 엄마였다. 지금 옆에 잠든 내 아이의 얼굴을 보며 오늘도 그 미안함을 나직이 전한다. 그리고 잘 자라주고 있음에 감사함을 전한다. 이렇게 건강하게 예쁘게 엄마 곁에서 있어주는 것, 그 자체가 너의 최고의 성장임을 엄마가 몰라서 미안하다고. 결코 너의 즐거운 성장에 방해가 되는 엄마가 되지 않겠노라고. 약속하고 또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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