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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부터 3시간전

내 아이의 생기부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학교생활기록부, 줄여서 생기부 혹은 학생부라고도 한다. 말 그대로 '학교에서의 생활'을 기록해 놓은 공식 문서이다. 지난 2주 동안 다들 틈만 나면 코 박고 생기부를 썼다. 교무실 분위기가 너무 조용하고 엄숙해서 아이들이 들어오다 겁을 먹고 뒷걸음질 쳤다.

대강하고 치워 버리자는 생각이 자꾸 기어 올라왔다. 하지만 나는 책임감 빼면 팥 없는 붕어빵인 대한민국의 교사가 아니던가. '너희들의 1년을 기록해 주마' 정신으로 입술을 꽉 깨물고 키보드를 두들겼다. 그리고 드디어 1차 입력을 마쳤다. (눈알 빠질듯한 수정 작업은 남았지만)




다음은 생기부 영역 중 학생의 특성을 가장 잘 설명해 준다고 생각하는 영역이다. 고입, 대입 입학사정관들이 가장 중요하게 보는 내용이기도 하다. (모든 내용은 학교마다, 교사마다 차이가 있음을 감안하고 봐주시길 바랍니다.)


1. 과목별세부능력특기사항
2.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3. 독서활동 기록



1. 과목별세부능력특기사항(과세특)

각 교과의 선생님이 기록
수업 시간 활동 내용과 학습 태도에 대해 주로 작성
우수한 학생과 아닌 학생 간의 격차가 가장 큰 영역



모든 학생의 과세특을 쓰는 것이 의무는 아니다. 자유학기(1학년 1학기)에는 모든 학생의 과세특을 쓰는 것이 원칙이어서 억지로 내용을 다 채웠다. 그러나 자유학기가 끝난 1학년 2학기부터는 사정이 다르다. 수업 시간 태도가 좋은 학생의 과세특만 쓰기 때문에, 생기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하게 나타난다.

과목세특의 내용이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수업 시간 선생님이 내준 과제를 성실히 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 보통은 과제 결과물을 보고 쓰기 때문이다. '교사가 직접 관찰한 것을 쓴다'가 생기부 기록의 기본 원칙인데, 수업 시간에 일어나는 다양한 일을 모두 기억하여 작성하기란 쉽지 않아 내가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발표를 잘하고, 질문을 열심히 하며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당연히 좋다. (웃기거나 주목받기 위해 아무 소리 나 해대서 수업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이가 나서는 것을 어려워해도 괜찮다. 수업 시간 선생님과 대화한다는 마음으로, 눈을 마주치며 은은한 미소와 함께 끄덕끄덕 하면 된다. 수업에 잘 참여하는 아이를 보면 마음이 훈훈해진다. 그럴 때 사탕 대신 생기부 문구 한 줄을 선물한다.




2.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행발)

담임선생님이 일 년 동안 학생을 관찰하고 평가하여 종합적으로 기록하는 영역
학생의 전반적 성격, 특성, 기대할 점에 대해 작성
아이의 학교 생활을 가장 잘 기술하는 영역이기도, 아니기도



행발은 학년말에 한 번만 쓴다. 쓸 내용이 느닷없이 12월에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누가기록을 해 놓고 그 근거로 작성한다. [여름맞이 선풍기 닦기에 자원하여 열심히 닦음 / 팔을 다친 친구의 급식을 대신 받아 줌 / 친구와 이러저러한 이유로 싸워서 지도함 / 복도에서 친구의 다리를 차서 지도받음 / 어머니와 이런저런 내용으로 상담함 / 청소를 할 때 책상 줄을 바르게 맞춤] 학생의 특성과 성장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도록 세심한 관찰과 정성이 필요한 영역이다.

누가기록이 쌩얼이라면 생기부 행발은 풀메이크업 얼굴이다. 어떤 것은 거의 신부 화장 수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오해는 마시라. 훌륭한 아이는 있는 그대로 써도 너무나 예쁘다.

항상 웃는 얼굴로 인사하는 밝은 모습이 인상적인 학생임. 학급에서 아침 칠판 닦기 역할을 맡아 아침마다 일찍 등교하여 역할을 성실히 수행함. 친구들에게 고운 말을 쓰고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어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받음. 바른 수업 태도를 가지고 있는 학생으로, 탐구하는 자세로 공부하는 모습을 보임. 자신의 미래를 위해 긍정적인 태도로 성실히 노력하고 있어 앞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됨.


문제는 생활 태도가 별로인 아이들이다. 그래도 나중에 성공해서 선생님을 찾아올지도 모르니, 안 좋은 말은 되도록 피하고 좋게 포장해 준다. 좋은 점이 콩알만큼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수박만하게 뻥튀기시켜주는 것이 내 몫. 날이 갈수록 얼굴 화장은 점점 옅어지는데, 말로 꾸며대는 실력은 메이크업 아티스트 경지에 이른듯하다.

자기주장이 강하며....... 좀 더 유연한 사고를 가진다면 앞으로 더욱 발전할 것으로 기대됨.
-> 선생님을 포함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제 멋대로 행동해서 친구와의 트러블이 많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입장도 잘 생각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다.


친구와 즐겁게 생활하는 것을 가장 소중히 여기며..... 좀 더 진지하게 목표를 세워 자신의 미래를 탐색하는 자세를 가진다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됨.
-> 맨날 놀기만 해서 걱정이다. 정신 차리고 뭐라도 하면 좋겠다. 방학 동안 하던 대로, 다니던 학원에 생각 없이 가방만 들고 다니지 말고 진로와 학습에 대해 한 번 짚고 넘어갔으면 좋겠다.


지나친 장난으로 인해 교사의 지도를 받을 때도 있었으나 자신의 잘못한 점을 반성하고,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임.
-> 장난을 심하게 쳐서 여러 번 크게 혼났다. 그래도 반항하지는 않았으며 코딱지만큼은 달라진 것 같다. 부모님도 아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도록 노력하고, 잘못된 사고방식과 행동을 함께 고치면 좋겠다




3. 독서상황기록

담임교사(공통), 교과 담당 교사(교과별) 각각 작성
학생이 읽은 책 제목을 학기별로 기록
학생의 관심사와 자기 주도적 노력을 보여줄 수 있는 영역
특목고에 관심 있다면 가장 정성을 기울일 분야


학생이 읽은 책의 제목과 저자만 학기별로 기록하면 끝. 교사에게는 글짓기가 필요 없어 고맙고, 학생에게는 독서 역량을 보여주는 본격 뽐내기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예전에는 책을 읽고 학생이 기록한 내용도 요약적으로 쓰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교육부에서 아이가 써온 것보다 선생님이 써주는 문구가 더 훌륭한 경우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서 제목만 쓰는 것으로 바뀐 듯하다.)

그렇다면 어떤 책이 좋을까. 고등학생이라면 자신이 가고 싶은 학과의 진로에 맞게 깊이 있는 책으로 목록을 채우면 가장 좋다. 하지만, 중학생의 경우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다양한 분야를 탐색해 보는 독서 목록이면 충분하다. (물론 뚜렷한 진로가 있다면 그것에 맞는 독서기록도 좋지만, 자칫 사고가 좁아질 수도 있기 때문.)

중학생 수준에 적절한 책을 읽고 생기부에 기록하는 것이 좋다. 개인적으로는 중학생이 <만복이네 떡집>이나 학습만화를 생기부에 기록하는 건 좀 그렇다고 생각한다. 독서의 수준이 곧 그 사람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니까. (나는 <만복이네 떡집> 시리즈가 새로 출간될 때마다 유치원생 아이와 함께 재미있게 읽는 열혈 독자이다.)


중학교 1학년 우리 반 과학고 꿈나무가 <이기적 유전자>라는 수준 높은 책을 읽고 독서기록을 들고 왔다.

[이 책은 유전자에 대한 내용이다. -끝-]

선생님 : ㅇㅇ야, 책에서 읽은 것 중 기억에 남거나, 새롭게 알게 된 내용 말해봐.
꿈나무 : 아, 그, 저. 하하. 저 진짜 읽었어요!

생기부에 책 제목만 쓰라고 한 것은, 면접을 통해 아이의 독서력을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면접관이었다면 '꿈나무 학생의 생기부는 뻥튀기되었구먼.'이라고 생각할 듯. 공들여 만들고 쓴 생기부 자체의 신뢰성에 금이 가는 것이다. 단순히 생기부에 책 제목 몇 글자 추가하고 만족하면 안 된다. 자신의 독서 기록장에 읽은 책의 내용과 생각한 점을 꼼꼼히 정리해 두어야 한다. 생기부에 남길만큼 의미 있는 책이라면 머리와 마음에 잘 새겨 두자. 애써 읽은 내용이 거짓이라고 오해를 받으면 안 되니까. 그리고 이 순간 성장의 기록이니까.




중학생의 생기부를 쓰다 보면 가끔 ‘이걸 누가 본다고’ 하는 생각에 맥이 빠질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적는 생기부는 지금 이 순간 아이들의 삶의 조각이다. 기록은 지나간 시간을 붙잡아주고, 그 순간을 빛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그렇기에 책임감과 애정을 담아 키보드를 두드린다. 생기부는, 일 년 동안 함께한 아이들과의 인연에 대한 예의이자, 작은 응원이기 때문이다.

일 년 동안 함께 한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북두칠성처럼 빛나는 별도 있고, 이름 없는 별처럼 아직 스스로의 빛을 찾지 못한 아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름 없는 별이라 해서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언젠가 그 별이 빛날 순간을 믿으며, 반짝이는 찰나를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자. 그 순간들을 기록하는 일은 단순한 문서 작업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더 많은 아이들이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두려움 없이 세상에 내보이는 용기를 보여 주었으면 한다. 도전은 아이들이 자신의 가치를 더 크게 빛낼 수 있는 힘이 된다. 그 용기가 피어나는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며, 그들의 이야기가 더 찬란해지도록 돕는 사람이고 싶다. 그것이 선생님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아이들은 함께 배우고, 열심히 책을 읽고, 친구들과 웃는 모습을 보여주고,  나는 다정한 눈으로 지켜보았으면 한다. 소소한 순간들이 결국 한 사람의 이야기를 만든다. 그 빛나는 조각들을 놓치지 않고, 한 문장 한 문장을 아름답게 기록해주고 싶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며, 나 역시 선생님으로서 한 페이지를 써 내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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