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하는 중입니다.
“우리 헤어지자.”
“내가 잘할게.”
“헤어져.”
“너 나 사랑하니?”
“...”
“...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그래. 헤어지자.”
고등학교 때부터 최근까지도 몇 번이고 다시 본 유지태와 이영애가 주연인 영화 ‘봄날은 간다’의 장면이다.
고등학교 때 이름이 같아 친해진 친구가 좋아하던 영화라 나도 보았다.
너무나 아픈 사랑을 보며 ‘아, 바로 저게 으른들의 사랑이구나.’
어딘가 아려오는 감정을 추스르며 무릎을 탁 쳤다.
영화 상에서 이영애(극 중 이름 은수)는 말 그대로 ㅆㄴ이다.(거친 언어는 정말 죄송하지만 이거 말고는 표현할 방법이 없네요. ㅠㅠㅋㅋ)
새하얗고 청순한 여신의 외모를 가진 그녀는 순진한 총각 유지태(극 중 이름 상우)에게
라면 먹고 갈래요?
에 이어
자고 갈래요?
라는 그 누구도 감히 거절하기 힘들 유혹을 당차게 한다.
이혼의 상처 때문인지,
원래 그런 사람인지,
가정환경 때문인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는 상우와 친밀해지는 관계에 거부감을 느낀다.
영화에서 라면은 그녀의 인스턴트식 사랑을 대표하고,
유지태는 그런 그녀에게 김치를 담글 줄 아냐고 묻는다.
상우 씨, 나 김치 못 담가.
김치는 상우가 바라는 뭉근하고 묵직한 이상적인 사랑을 대표한다.
라면과 김치.
색이나 매운맛은 같지만 만들어지는 성격은 정반대다.
둘은 그렇게 각자 자기만의 방식대로 사랑에 빠진다.
나를 좋아해 주던 사람들이 있었다.
나와 잘 맞는 사람도 있었고, 맞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고 나와 잘 맞으며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과는 (아주 드물었지만) 연인 관계로 이어졌다.
하지만 나는 불안정한 애착을 가졌다.
나에게 실망할까 봐, 나를 미워할까 봐, 나를 버릴까 봐 등 다양한 이유로
상대에게 마음을 많이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상대에 대한 우월감과 열등감이 동시에 차고 올라
사랑에 빠졌을 때 나의 감정을 스스로 주체하기 힘들었다.
사랑을 하면 행복해야 하는데, 괴로움이 더 커지는 시점들이 생겼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패닉에 빠졌다.
한편 상대는 애매하고 변덕스럽게 구는 나를 더 많이 좋아해 줬다.
한 발을 울타리 밖에 빼 두고 사랑하는 기분
상대방이 힘든 것은 당연한 일이고,
당사자의 마음에는 폭풍우가 휘몰아친다.
ㅆㄴ은 ㅆㄴ대로 힘들다.
은수와 나의 공통점을 찾아서 잘못을 옹호하거나 정당화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에게 거리를 둔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은
누군가에게는 이영애가 된 적이 있는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다.
누군가의 이영애가 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사람이라면,
내게 다가오는 사람은 모두 친구로 만들고, 연애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상우는 순수 그 자체 같은 청년이다.
회식 후 술 취한 밤 은수와 전화를 하다 그녀가 보고 싶다고 하자 당장 서울에서 강릉까지 택시를 타고 달리며,
그녀와 헤어지고 난 후 충격에 다니던 직장도 관둔다.
그에게 사랑은 늘 시간 속에 머물러있다.
상우의 어머니와 사별하고 혼자 남아있는 아버지도,
젊은 시절 외도로 마음에 큰 상처를 줬지만 먼저 하늘로 떠난 할아버지를 매일 역에서 기다리는 치매 걸린 상우의 할머니도.
그들은 모두 시간과 가슴에 사랑을 묻고 기나긴 애도를 한다.
애틋한 사랑을 고이 가슴에 묻었지만 자꾸 꺼내본다.
놓아주지 못한다.
나 또한 사실은 너무 사랑했고
내 곁에 변함없이 늘 있어주길 바라는 사람을 무수하게 괴롭힌 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좋은 사람이었는데, 왜 그렇게 상처를 줬을까.'
'다음번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내가 안정적인 연애를 꿈꾸며 노력하기 시작하자 상대방들의 마음속 회오리를 발견했다.
상대가 나를 대하는 행동에서 내 예전 모습이 보인다.
내가 해보지 않았다면 속에서 천불이 났을지도 모른다.
나도 느꼈던 감정이라 측은한 마음이 생겨난다.
안정적인 관계는 혼자서 만들어 갈 수는 없다는 걸 깨닫는다.
상대방이 혼자서 극복해야 할 문제이지 내가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곁에서 묵묵히 지켜주기에,
내 마음은 충분히 강하지 않다.
그리고 소중하다.
You deserve better.
(너는 더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
소중하게 대하는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만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남에게 ㅆㄴ인 사람은 스스로에게도 ㅆㄴ일 가능성이 높다.
봄날은 간다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상우가 멀어지는 은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와 마주 잡았던 손에 뜨겁게 입을 맞춘다. 그녀가 흐릿해진다. 멀어져 간다. 드디어 상우는 그녀를 진심으로 보낸다.
하루는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았다.
과거의 특정한 시점으로 돌아가 기억이 반복되지 않았다.
슬픈 음악을 들어도 잠시 뿐 다른 노래로 돌려버리지 않았다.
지난번 연애에서 나는 더 이상 ㅆㄴ이 아니었다.
나도 안정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가능성을 봤다.
생각의 생각을 파고들어 원인을 분석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무수히 했다.
나는 비교적 안정적인 사람이었다.
그걸로 됐다.
이젠 울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