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진료를 받으며 깨달은 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마음속에 천사와 악마가 함께 살고 있다.
천사 같은 나부터 말하자면
밝고 유머러스해서 주변을 환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나
잔뜩 애교를 부리며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충만한 나
삶의 열의가 가득한 나
부드럽고 친절하고 나의 작은 친절함이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나
나보다 약한 존재를 챙기고 보살펴주려 하는 동정심 많은 나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며 진심으로 내 기쁨과 슬픔처럼 깊게 공감하는 나
함께 사는 악마도 소개하자면
뭘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에 허덕이는 나
인생을 무의미하게 느끼는 나
그냥 전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
엄청나게 시니컬하며 비관의 바다로 빠진 나
열등감과 질투심에 눈이 머는 나
미움과 증오로 뒤덮인 나
우울의 바다에 깊게 빠져들어가면 죽어버리고 싶은 나
이 중에서도 제일 무서운 악마인 죽음이 2년 전 내게 말을 걸었다.
미쳐버릴 것만 같은 공황 증상이 내 생애 최고로 심하게 온 나날이었다.
‘확 죽어버릴까’
웃고 있어도 우울감이나 시니컬함이 기본적으로 탑재된 나의 두뇌는 인생이 종종 우울의 심연에 빠질 때 곧잘 죽음을 부추겼다.
죽으면 모든 게 끝날 텐데.
더 이상 이 악물고 애쓰지 않아도 되고,
꿈도 사랑도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미움도 행복도 사랑도 평화도 분노도 없는
절대적인 고요하고
있어도 없는 공간으로 갈 수 있을 텐데
그 와중에도 죽기 위한 과정을 떠올려보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전화를 걸었다.
우울감 말 못 할 고민 어쩌고에 전화하세요 1588…
자살에 관한 연예 기사에 흔히 있는 전화번호로.
‘상담사와 연결 중입니다.
통화 내용은 모두 녹음됩니다.’
녹음?
녹음된다는 말을 듣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죽고 싶다는 말을 상담사와 나누는 전화 통화가 녹음되는 건 싫었다.
그래도 태어났는데 살아야지 어쩌겠누.
내 주변 사람들도 내가 죽으면 슬퍼할 것 같다.
주변 정신과에 예약 전화를 걸었다.
잘한다고 소문나거나 가까운 곳들은 대부분 3개월 동안 예약 마감이고, 어떤 곳은 당분간 아예 예약이 어렵다했다.
내가 사는 곳은 학구열이 강한 곳에 속해서인지 유난히 아동심리상담을 하는 병원이 많다.
정신 건강이라는 게 뭔지도 모를 나이에 정신 건강에 영향을 끼쳤을 확률이 다분한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상담을 가는 아이들을 생각하니 안타깝다.
나도 어릴 때 상담을 꾸준히 받았으면 좋았을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심리센터를 가기엔 가격이 부담스럽고, 예약 없이 당일 진료만 가능한 정신과를 찾아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그런 병원은 대부분 상담보단 약 처방을 위주로 하는 곳이 많단다.
기나긴 대기 끝에 원장님과 마주한 순간
4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똑똑함과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마스크를 뚫고 나오는 자애로운 눈빛의 의사 선생님이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요즘 너무 우울해서요. 공황 증상도 있고…”
간단한 상담을 하고 약을 처방받았다.
한동안 심할 때는 약을 지니고 다녔다. 하지만 공황장애 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공황이 없어졌다. 선생님은 당분간 꾸준히 먹으라 하셨지만 한 두 번 먹고 말았다.
한 달 동안 일주일에 한 번 상담을 받았다.
상담을 가기 전에 나는 내 정신 건강의 문제를 알고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유튜브 영상을 포함해 나름대로 리서치와 공부를 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도움을 받아서) 깨달은 것들을 적어보려 한다.
1. 공황이 오는 이유와 공황이 잘 오는 사람의 특징
상담은 질문을 준비해 가는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가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나는 공부하다 궁금한 부분이 생기면 이걸 물어봐야겠다고 노트까지 해 둘 정도로 열정적으로 나의 심리에 관해 공부를 했다.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책을 알아야 나를 컨트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황이 잘 생기는 사람은 컨트롤의 욕구가 높은 사람이라고 한다. 통제 욕구가 강한 사람이 자기 뜻대로 되는 일이 없을 때 공황이 온다는 것이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내 몸뚱이 하나도 내 뜻대로 하기 어려운데 인간관계를 포함한 세상만사는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천지다.
내가 가진 유전자나 환경의 불안과 강박, 통제 욕구 속에 공황은 내 속에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현재에서 예전의 실패를 바로 잡으려 한다.
우리의 뇌는 비슷한 것과 익숙한 것을 옳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고, 예전의 실패를 다시 반복해서 바로 잡아보고 싶어 한다.
관계에서도, 부모님의 사이에 문제가 있었을 경우 부모님과 비슷한 사람을 만나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을 한단다. 그러한 시도의 대부분은 안타깝게도 실패를 반복한다. 비슷한 사람과 비슷한 패턴으로 과거의 관계는 대를 잇는다.
그 와중에 과거의 내가 간접적으로 경험한 관계의 실패를 바로 잡으려 노력한 나 자신이 짠하고 안타깝고 귀엽게 느껴졌다.
3. 믿음은 모래성과 같다.
‘내가 너를 얼마나 믿었는데…’
상대에게 맹신과 같은 믿음을 가지는 것은 바다에 모래성을 짓는 것과도 같다.
내 마음과 네 마음은 다를 수 있고,
내가 믿는 만큼 상대가 부응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닐 수 있다.
검증을 하는 과정이 필요함과 동시에, 너무 순진하게 상대방의 모든 것을 믿어버리지 않아도 좋다.
나는 이 세 가지를 깨닫고 나서 끝이 없을 것만 같던 공황과 우울을 극복하고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활기차고 열정적으로(?) 살고 있다.
엄청나게 섬세하고 초예민한 사람
불안이 많아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을 좋아하는 사람
그나마 가장 잘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이기 때문에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두려워하는 사람
금사빠 기질도 있었지만 이제는 나의 설렘 포인트들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된 사람
알고 보니 천사도 악마도 아니고 평범한 사람이었다.
죽으려고 마음먹어보니 더 이상 두려운 게 없다.
유튜브도 하고, 사업도 하고, 남들 시선 신경 쓰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산다.
앞으로 언제 어떤 우울한 상황에 빠져 또다시 허우적거릴지 모르겠지만,
오늘 새벽 나는 내가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