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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욕꼬질이들 Oct 17. 2019

우리는 감정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너도 나도 마음이 아픈 요즘


오랜만에 서점에 갔다.


서점의 맨 앞 줄에는 심리 분야의 서적들이 늘어서 있다.

베스트셀러 탑 50위 책들의 목록을 훑어본다.


상처 받은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 책, 용기를 잃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책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많다는 지표다.

내 마음 한편도 아리다.

나 또한 그중에 하나였다.


마음이 아프게 살아간다는 것


늦깎이 유학생 생활을 하며 학교 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내가 대학교를 다니던 때와 다르게 넘치는 체력으로 밤샘 과제를 척척 해내기는 더 이상 무리였고, 오픈 마인드를 가장해 열 살 이상 어린 친구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리는 것도 때로는 힘에 부쳤다. 특히 어린 친구들과 함께 놀면서 나이만 먹었지 그들보다 하나 나을 게 없는 내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가장 힘이 들었다.


직장생활 또한 쉽지 않았다.

내가 다니던 안정적이고 비교적 평등한, 보수적이고 심심한 단체를 벗어나 처음으로 진정한 약육강식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강자가 약자를 부리는 시스템에서 사회적 최약자 사이에 둘러싸인 외국인 노동자의 설움을 느꼈다. 착한데 눈치 없고 지나치게 밝아 미움을 사기에 적합한 캐릭터인 나는 늘 소외감을 느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어려웠다. 학교도 직장도 나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내 기필코 네게 인생 최대의 시련을 주마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상황이 나를 모서리로 뾰족하게 몰아붙였다.

세상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슬픔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


친구와 수다 떨기(그나마 다행인 건 학교와 직장 밖에서 소중한 친구들을 몇 만났다.), 남자 친구와 데이트 하기. 닥치는 대로 심리학 서적과 대화 기술에 관한 책을 읽었고, 침대에 누워 유튜브에 있는 무수한 강연들을 보았다.


강연은 김창옥 교수님으로 시작했다가 법륜스님과 심리학자 Jordan B Peterson으로 끝이 났다.


김창옥 교수님은 강연도 지나치게 많이 보지는 말라고 했다. 뭐든 지나치면 문제가 있는 거라고 말이다. 당시 나는 내게 문제가 '있다, 그리고 많다'라고 생각했다. 그 강연들은 상처 받았다고 느끼던 나의 마음에 임시방편으로 밴드를 붙여주었다.


한 편 법륜스님은 인간세상의 삼라만상을 통달한 사람 같았다. 아무리 심각한 고민을 가진 사람도 스님의 머릿속을 거치고 나면 '뭐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그런다'가 되어 버렸다.


모태 나일론 천주교 신자인 나는 불교의 교리에 심취했고, 무슨 일이 닥쳐도 '별 일도 아니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강의 마라톤을 멈출 수 있었다. 


감정 과잉의 시대

; 감정을 지나치게 평가 절하하던 기존의 세태에 반향 한 과도기적 흐름


최근 가까이에 늘어선 수많은 책들과 무수한 강연들은 우리가 순간적으로 느끼는 감정을 지나치게 확대해서 대단한 일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다. 특히 공격을 당하면 다양한 수단을 이용해 나 자신을 방어하고 받아쳐내야 한다는 점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지나친 먹방의 향연은 촉각을 제외한 감각들의 쾌감에 오로지 집중하도록 한다.

그래서 요즘의 심리학 혹은 인간관계에 관한 서적이나 먹방을 보고 있으면 복잡한 세상사를 잊어버리고 잠시나마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다시 시궁창으로 떨어진다.


또다시 책을 읽고 먹방을 읽고 본다.



'상처를 받았다'는 표현은
상대방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상대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나는 '나약하고 약한 사람'으로 만들어
일종의 자기 방어 기제로 활용할 수 있다.


상처를 받은 것도 내가 받은 것이고, 상처를 준 것도 내가 준 것이다.


반면 상처를 준 사람은 자기가 원해서 준 게 아닐 수도 있다.


어릴 적에 받은 사랑이 부족해서,

현재 삶에 만족하지 못해서,

원래 성격이 그래서,

그 당시 기분이 별로여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은 것을 화풀이하느라고,

나의 부모가 나에게 대하던 방식이 그랬기 때문에,


이밖에도 상대가 나에게 상처를 준 이유를 추론하면 수도 없이 많다.


물론 피해자의 시점으로만 보자면 그 어떠한 이유로도 상대방이 내게 상처를 준 것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정작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왜 그렇게 상처를 줬나요?"


라고 직접 장본인에게 묻는다면,


1. 상대방은 이미 기억에서 지웠거나 '어? 내가 그랬어?'


2. 오히려 화를 내거나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그 모양이니까 그렇지.'


3. 정작 본인도 이유를 모를 것이다. '글쎄,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누군가를 싫어하면 상대방은 그 사실도 모르고 잘 만 사는데, 정작 싫어하는 내 자신만 고통받는 것과 비슷한 논리다.


나에게 상처를 주는 상대방에게 그가 나에게 행한 똑같은 방식(혹은 더 영악한 방식)으로 공격하는 것은, 오히려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도 않는 상대방이 한 말들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나를 상대적인 약자로 만들어 내가 가진 방어막을 필요 이상으로 두껍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중요한 문제는,

'과연 그러한 방식이 내 삶에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는가?'

라는 점이다.


내가 상대를 '저 사람은/이 세상은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장소'라고 이름을 붙이고 내 자신에게 갑옷을 꽁꽁 입혀 방어를 하는 순간, 그들에 대한 분노와 나에 대한 연민은 배가 된다. 분노는 미움이 되고, 미움은 원한이 되어 나 자신이 풍기는 분위기가 된다.


한창 직장 동료에 대한 미움에 사로잡혀 있던 어느 날, 새로운 시즌 촬영을 하기 위해 포토그래퍼가 왔다.


본격적인 촬영을 시작하기 전 그가 마구 찍은 사진에 우연히 등장한 내 모습을 보고 경악을 했다.

미움과 분노가 가득 차 잔뜩 심술이 난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고슴도치처럼 '날 공격하면 가만두지 않겠어!'라고 온 얼굴과 몸으로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찰나의 순간에 찍힌 그 사진에 나는 아직도 정말 감사한다.

그 날 이후 나는 스스로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넌 사진에서 본 사람과 친구 하고 싶니?'


'아니. 절대로.'


'근데 불쌍한 아이 같아. 마음을 풀고 힘을 낼 수 있도록 네가 도와줄래?'


나는 그렇게 나의 친구가 되어 주었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상대로 나를 택했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한 존재라고 스스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전의 강의를 들으며 마음을 다스리는 방식과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실행하는 것은 차이가 컸다. 대다수의 강의나 도서들이 인스턴트식으로 내게 잠시나마의 먹방 같은 힐링을 주었다면, 고난과 역경에 정면으로 부딪히고 스스로와 대화를 나누며,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고 내 결핍을 찾는 반복적인 연습들은 내게 값으로 매기지 못할 만큼의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상대에게 날카로운 말을 들었을 때, 세상에게 버림받은 기분이 들 때, 한 번 더 혹은 몇 번이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거나 내가 개선할 수 있는 점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보았다. 도저히 상대나 상황이 이해가 안 될 때에는 '아, 그냥 기분이 나쁜가 보구나.'혹은 '재수가 없구나.'하고 말았다. 내가 부족해서 못나서 약해서 받아치지 못했다는 후회는 그만 두기로 했다. 그 일들은 뒤로 하고 내가 당장 할 일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내가 읽은 수많은 심리학이나 대화기술에 관한 서적들보다 도움이 되었다. 그래도 아직 사람들과 대면하면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호흡 조절이 안 될 때가 있기도 하고, 쓸모없는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녹초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앞으로도 오랜 기간 동안 나는 상대방이나 내 감정에 집중하기보다는, 명백한 사실과 감정을 분리하면서 내 마음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눌 예정이다. 감정의 노예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 자신을 가장 먼저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서 말이다.




 






삶은 원래 고통이다.
당신의 지독한 고통을 짊어지고 그것을 견뎌내라.
네가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서 세상을 더 나쁘게 만들지 마라.

- 조던 B. 피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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